박민규

읽은것들 2007/11/11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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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쾌하되 가볍지 않고,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깔깔대며 뒹굴게 되는 점이 한 두 군데가 아니지만, 그 깔깔거림은 나의 마음, 우리의 삶, 세상, 인류의 그 어딘가 있을 상처들에 뿌리박힌채 부유한다.

 이번에 읽었던 <누런 강 배 한 척>은 예전 스타일과는 사뭇 다르다. 항상 그의 소설의 주인공은 소년이거나, 소년이고싶어하는 어른이거다, 이런 미성숙한 존재들이었는데 - 죽음을 앞둔 노인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것 자체가 스타일의 변화인 것일까. 자기 아버지 '댄디 박'에게 바치기 위해 썼다는 소설이라서 그런 것인지. 난 예전 스타일이 더 좋은데.

 어쩌다 보니 흔치 않게 챙겨보는 작가가 되어 버렸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여전히 재미있고, <카스테라>는 읽으면 읽을수록 단물이 나온다.


  "상상력의 수준에서 보면 박민규의 소설은 가볍고 경쾌하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친다면 그의 작품은 대중소설이나 인터넷 소설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진중하게 당대의 모순점들을 포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형식적 가벼움은 내용적 무거움과 이질적으로 조합되면서 새로운 소설 문법을 형성한다. 그것은 기승전결이라는 논리적 인과성과 서사적 필연성을 필요로 했던 전통 서사에 대한 하나의 반기에 해당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전개되는 일인칭 화자의 장광설은 때로는 시대의 정곡을 찌르고 때로는 신경증에 걸린 환자의 어법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믿거나 말거나'식 소설의 세계를 빚어낸다."

 - 오태호(문학평론가) <박민규론-요설(饒舌)의 수사학, 무애(無礙)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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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읽은것들 2007/11/10 04:21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 하고,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며느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곳을 택하겠는가.


 처음 열차가 들어오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열차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 아아,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뭔가 댐 같은 것이 무너지는 광경이었고, 눈과 귀와 코를 통해 머릿속 가득 구토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코치 형이 고함을 질러주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놈의 먹이가 되었을 테지. 정신이 들고 보니, 놈의 옆구리가 흥건히 고여 있던 구토물을 다시금 빨아들이고 있었다. 발전(發電)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힘! 그 때 코치 형이 고함을 질렀다. 해서, 엉겁결에 - 영차, 영차 무언가 물컹하거나 무언가 딱딱한 것들을 마구마구 밀어 넣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어찌 내 입으로 그것이 인류(人類)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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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코리언 스텐더즈

읽은것들 2007/11/09 15:26
 

 어슴푸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키 큰 옥수수의 군집이, 그래서 몰살당하기 직전의 슬픈 새떼처럼 느껴졌다. 스스로의 직감으로 위기를 알아차렸는지, 옥수수밭이 하나의 물결로 술렁이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밭의 어귀에 뛰어들어와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고, 다만 그것이 그 순간의 최선이었다. 촤아아. 갑자기 어디선가 파도 소리 같은 것이 일기 시작했다. 원반들은, 확실히 아까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맴을 도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나는 어떤 힘에 떠밀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몇 걸음 떨어져 있던 기하 형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휘어진 한 무더기의 옥수수대가 우리를 누르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무게였다. 겨우 힘을 합해 옥수수 더미를 빠져나오자, 이미 원반들은 보이지 않았다. 원반들이 사라진 하늘 저편에서, 희끄무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눈앞의 풍경은 그야말로 괴의한 것이었다. 일정한 패턴을 이루며 옥수수들은 완전히 휘어져 있거나 서 있거나 그랬다. 보기에 따라, 그것은 정확한 비례의 선(線)을 이루고 있는 느낌이었다. 형, 이거 크롭 서클(Crop Circle)일지도 몰라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가 말했다. 크롭 서클?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어요. 높은 곳에서 보면 도형이나 기호가 그려져 있는데, 그게 외계인의 메시지라는 학설이 있어요. 메시지? 역시 숨을 몰아쉬며 기하 형이 대답했다. 창고로 돌아가는 두 명의 허수아비처럼, 터벅터벅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타세요, 나는 시동을 걸었다. 겁먹은 풍뎅이처럼, 심한 공회전 소음을 일으키며 사륜구동이 언덕의 급경사를 올라섰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언덕의 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찾은 허수아비처럼, 두 팔을 허하니 벌린 마음으로 옥수수밭의 전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엔




 가 그려져 있었다. 놀랍도록 정확한 비례의, 거대한 KS였다. 이놈들… 하고 기하 형이 말문을 열었다. 우릴 너무 잘 알고 있구나. 아, 하고 나는 그래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해는 이미 떠오를 만큼 높이 떠버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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