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약자의 살을 삼키는 육식
읽은것들 2008/05/19 22:00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의 ‘식육’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와 동류다.” 성호에게 인간과 만물(동물과 식물)은 동일한 속성을 갖는다. 그 동일한 속성이란 생명이다. 다만 그 생명의 위계는 있다. 곧 인간-동물-식물의 위계다. 위계의 논리는 이렇다. “초목은 지각이 없어 혈육을 가진 동물과 구별되기에 그것을 취하여 살아갈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날짐승ㆍ길짐승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의지를 갖는다는 점에서 사람과 동일하다. 어떻게 차마 해칠 수가 있단 말인가?” 생명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고 불가피하게 다른 생명을 취한다. 식물은 생명이지만, 지각이 없다. 고통을 느끼거나 표현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식물을 취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날짐승ㆍ길짐승은 생명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또 죽음의 고통을 느끼고 표현한다.
인 간은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존재다. 그러니 어떻게 인간과 동일하게 생명의지를 지닌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인간이 동물성 단백질을 원하는 것 역시 생명의지의 소산이다. 동물을 식품으로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호는 생명주의자이지만 대책 없는 생명주의자는 아니기에 동물의 생명을 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물 중에서 사람을 해치는 동물은 이치상 마땅히 잡아 죽일 수 있다. 또 사람이 기르는 가축들은 사람에 의해 길러졌으니, 사람에게 그 생명을 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동물은 잡거나 죽일 수 있다. 당연하다. 또 사람이 키우는 동물, 곧 가축은 본디 먹기 위해 키운 것이니 사람이 그 생명을 취할 수 있다. 역시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이 동물의 생명을 제한 없이 취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성호는 다시 묻는다. “그래, 가축은 그렇다 하자. 하지만 저 산에서, 물에서 절로 나고 절로 자란 것들이 모두 사냥과 고기잡이의 대상이 되는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인가?” 가축이 아닌 자연 속에 나고 자라는 동물의 생명을 인간이 무슨 권리로 빼앗느냐는 물음이다. 다시 말해 사냥과 어업은 과연 정당한 행위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난처한 질문에 어떤 사람이 성호에게 내놓은 답은 이렇다.
“만물은 사람을 위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다.” 이 이기적 인간중심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성호는 “좋다. 이는 사람의 피를 빨아 먹고 산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를 위해 생겨났다는 말이냐?”라고 반박한다. 이래서 이기적 인간중심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
“육식은 군자로서도 부득이한 일이니, 또한 마땅히 부득이한 심정으로 먹어야 할 뿐이다. 만약 욕망을 한없이 채우려고 거리낌 없이 살생을 저지른다면, 약육강식의 논리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성호는 이기적 인간중심주의의 원산지를 서양이라고 생각한다. 성호는 어떤 사람이 서양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만물이 모두 사람을 위해 생겨난 것이라면, 저 벌레들이 생겨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서양 사람은 “새는 벌레를 잡아먹고 살이 찌는데, 사람이 그 새를 잡아먹으니, 이것이 곧 사람을 위해 벌레가 생겨난 까닭인 것이다”라고 답하는데, 군색한 답변이다. 성호 역시 ‘이 말 또한 구차한 변명’이라고 지적한다. 그렇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인간은,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저 하늘과 땅과 바다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날짐승, 길짐승, 물속 짐승의 생명을 끊을 그 어떤 권리도 없다.
유학자인 성호는 이 근본적 물음에 대해 뜻밖에도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자비를 떠올리며 그것이 옳은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육식의 습관 역시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노인의 봉양과 제사, 손님 접대, 병의 치료에 고기를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어떤 한 사람(아마도 석가모니)의 견해로 갑자기 고기를 먹는 습관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육식도 불가피한 것이라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 성호의 결론을 들어보자. “그렇다면, 육식은 군자로서도 부득이한 일이니, 또한 마땅히 부득이한 심정으로 먹어야 할 뿐이다. 만약 욕망을 한없이 채우려고 거리낌 없이 살생을 저지른다면, 약육강식의 논리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육식은 불가피한 것이나 살생은 최소한의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식욕을 채우려는 무분별한 살생을 피하라는 것이 성호의 주장이다.
성호의 육식론을 꺼낸 것은, 물론 미국 쇠고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뼛조각만 나와도 수입을 금지하던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180도로 바꾼 것을 보면, 앞으로 수입될 쇠고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정부의 설득을 믿고 싶지 않다. 촛불집회를 열고 저항하는 것은 시민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다. 또 그 저항의 불빛 속에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들어 있다. 한데, 내가 주목하는 곳은, 그 존중심이 터잡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이다.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성호의 말처럼 짐승의 생명은 소중하지 않은가. 성호는 가축은 먹어도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가축을 기르는 방식이란 현대의 자본주의적 축산업의 방식이 결코 아니다. 현대의 축산업은 공장이다. 그 공장에서는 한 마리가 겨우 들어갈 공간에 닭을 집어넣고는 부리를 잘라 버리고 전등을 하루종일 켜 둔다. 닭은 오직 알을 낳는 기계일 뿐이다. 짧은 시간에 사료를 강제로 먹여 소와 돼지의 살을 늘린다. 짐승은 젖과 살, 곧 단백질을 공급하는 사물일 뿐이다. 그 사물에는 생명이 없다. 근대 이전의 축산이 이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성호는 인간의 식욕을 채우려는 무분별한 살생을, 강자가 약자의 살을 삼키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란 강자의 횡포를 통탄한다. 하지만 우리 역시 동물에 대해 강자의 횡포를 부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루아침에 모두들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동물의 생명이지만, 생명을 오로지 이윤만으로 보는 자본주의적 축산업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강명관/부산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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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주장으로 현대의 축산업을 정당화 하기엔 육식자본주의의 순환은 너무 멀리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