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모두가 불안하며 모두가 기괴한 흥분에 사로잡혀 자신을 표현하고 제시하려는 충동에 시달린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기분인 불안은 우리 모두를 조울증에 사로잡힌 주체로 만들어 버린다. 열정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키려는 의지에 현혹되어 있는 나 그러나 끊임없이 무한경쟁에 낙오될 수 있으며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해야 하는 나. 이런 불안한 주체의 모습은 곧 탈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자신의 노동하는 주체를 생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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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와 주변의 공포
시대의 기분 - 우울과 불안
항우울제가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우울증의 시대는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었다. 알다시피 지금은 “비아그라”의 시대이다. 어디에선가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듯이 비아그라는 만성성욕항진상태에 잠기도록 우리를 몰아넣는, 기괴한 혹은 물질화된 윤리적인 명령이다. 섹스는 오르가즘의 생리학으로 환원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섹스의 명령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우리 시대에 쾌락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그것은 또한 소비자본주의의 스펙터클이 쉼 없이 쏘아대는 주문(呪文)의 모습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우리를 찍어 누르고 있는 웰빙 현상은 바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지닌 뻑뻑한 위협을 보여준다. 한 알의 푸르스름한 당의정 안에 객관화되어 있는 윤리적인 명령, 그것을 지젝을 쫓아 이야기하자면, 당연히 “즐겨라”일 것이다. 물론 그 즐겨야 한다는 명령은 외부의 어떤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통제자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돌보는 자의 보편적 심리학이 되었다. 더불어 자신을 돌보고 변화시키는 자유는 얼굴 없는 명령이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상상하는 구속되지 않는 삶의 상태인 자유(자유에 관한 표준적인 정의처럼 되어버린 이사야 벌린이 <자유론>에서 언급했던 그 자유)는, 이제 실체 없는 강압이 되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얼굴 없는 명령, 목소리 없는 강제. 그런 점에서 불안은 또한 우리 시대의 자유에 부착된 미망(迷妄)이기도 하다. 우울의 시대에 명령은 바깥으로부터 도착했다. 자신이 복종하거나 따라야 할 규범은 외부에서 자신에게 행사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그 외부를 자신 안에 옮겨 넣을 수 있다. 바깥에서 행사되는 명령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으로 바꾸어내는 장치가 만들어졌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푸코가 말했던 저 유명한 고백(the confession)의 주체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양심의 주체가 바로 그에 해당될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우러나는 명령에 따르는 주체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것은 바깥의 명령의 반영이고 그것은 역으로도 그러하다.
그러나 불안이 비롯되는 장소는 따로 없다. 그것은 도처에 있고 또한 어디에도 없다. 그저 불안에 압도당하는 주체만 있을 뿐이다.
“파랑새 증후군”이니 “생존자 증후군(survivor syndrome)”이니 혹은 “노동중독”이니 하는 현상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이 모두는 노동과 상관되어 있다. 20대 초반의 직장인들이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 지긋이 눌러있지 못하고 계속하여 자리를 옮기는 증상을 파랑새 증후군이라 부른다. 생존자 증후군이란 끊임없는 구조조정이 끝난 뒤에 자리를 지키게 된 이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가리킨다. “노동중독”이란 말뜻 그대로이다. 일에 미친 사람이다. 사람들은 일에 몰입하고자 하며, 일을 사랑하고 일을 숭배한다. 이 모두는 불안이다. 노동하는 주체의 모습 역시 우울에서 불안의 궤적을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설명할 작은 초상을 그려볼 수 있다. 노동자와 직장인들이 마시던 음료의 변천을 생각해보자. 스트레스와 피로에 찌든 노동자의 모습은 80년대와 더불어 사라지는 듯이 보인다. 그 때까지는 “박카스”와 “우루사”의 시대이다. 피로회복과 자양강장의 시대였고 노동자들에게 문제는 스트레스와 권태라는 우울이었다. 그리고 이는 테일러주의(Taylorism)과 포드주의(Fordism)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잠시 술독을 풀어주는 “컨디션”이 잘 팔리는 시대가 있었다. 90년대였다. 이 때엔 영업과 기획, 마케팅이 중요한 시대였고, 소비자본주의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권태를 잊고 고역스러운 노동에서 벗어난 기쁨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획과 마케팅, 영업을 위해 술을 마시는 시대였다. 신세대가 등장하였고 틈새시장이니 고객만족이니 하는 용어들이 세상을 휩쓸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가 흔들리고 있었고, 과소비를 푸념하는 목소리가 웅성거리며 들려왔다. 마이카 시대니 배낭여행이니 하는 말들이 이제는 먼 옛날처럼 여기지리만치 소비자본주의는 맹렬하게 삶의 속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더 이상 우울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불안이 바야흐로 세상을 좀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불안이 바야흐로 세상을 좀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환위기를 거쳐 지금에 접어들었다. 빠르게 바뀌는 제품생산의 주기, 변덕스러운 소비자의 욕구, 걸핏하면 들먹이는 무한경쟁의 전지구적인 개방 그리고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지식의 생산과 소비가 시대의 기분을 바꾸어버렸다.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이 들이닥친 이후 우리는 노동자와 직장인을 가리키는 표상이 사라진 음료의 시대를 살고 있다. “비타500”이니 하는 웰빙 음료가 이제 시장을 석권한다. 지식기반정보사회라는 개념이 상용어가 되었고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같은 신조어가 세상을 떠다니는 시대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여선 안된다는 주장이 범람하고 안주하고 기생하는 사람보다 변화에 도전하고 변화를 촉진하는 직장인만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제 시쳇말이 되었다.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에 부와 노동의 관계, 그리고 일과 삶의 관계는 혼란스러워진다. 노동과 일을 둘러싸고 오랜 동안 유지되어왔던 사고의 습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변화를 두려워하다 망한 사람들에 관한 우화집인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이영진 옮김, 진명출판, 2000 같은 책이 장안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익숙한 것과의 결별 - 대량실업시대의 자기 혁명?, 생각의나무, 1998 이란 서정적인 제목의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책을 쓴 이는 인문학적인 자기계발서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며 우리 시대의 최고의 경영컨설턴트 겸 윤리학자가 되었다.
시대의 기분, 시대의 인식 - 노동이라는 소실매개자(vanishing mediator)
우리는 이 글에서 우리 시대의 불안한 주체를 다루려 한다. 그러나 그 불안한 주체란 심리적인 문제를 앓는 개인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막연한 시대의 감정에 시달리는 사회적인 군상을 가리키는 것 역시 아니다. 불안한 주체란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하는 주체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성적인 개인의 태도와 감정이기에 앞서 변화된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주체의 모습이다. 기분이라는 감정의 배치는 또한 사회의 물질적 관계의 배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안한 주체란 심리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새로운 자본주의사회의 주체성을 가리키는 초상이다.
이 글은 불안을 겪는 주체를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의 변화된 노동의 모습과 연결한다. 시대의 기분은 곧 자신이 사는 시대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충동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러나 시대의 기분은 시대의 전모 혹은 아직도 그 개념에 충실할 필요를 느낀다면 시대의 총체성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보이는 징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대의 기분은 시대에 대한 인지적인 독해에 이르지 못했을 때, 우리가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 의지해야 하는, 불완전하고 소극적인 사유의 방법이다. 당연히 (프레드릭 제임슨의 유명한 제안처럼) 시대를 “인지적으로 지도 그리는(cognitive mapping)”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1
그러나 인지적 지도그리기를 통해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총체성을 그려내는 것은 비웃음의 대상이 될게 분명하다. 알다시피 우리 시대에 가장 비웃음거리가 된 개념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그것은 총체성이란 개념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적 재현을 시도하려는 어떤 노력도 거대 서사란 이름으로 혹은 계몽적인 이성의 횡포란 이름으로 규탄받아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에 굴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비판해야할 대상은 거대서사가 아니라 외려 “물신적 총체성”이다. 사실 우리는 자신을 에워싼 세계를 재현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한 치도 자유롭지 못하다. “위험사회”에서 가장 잘 팔리는 것은 트렌드에 대한 분석과 기회 분석을 가능케 하는 프로그램과 소프트웨어라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이비 미래학이 시대의 학문이 되었다는 것도 우울한 일이다. 다시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빌자면 이런 총체적 재현을 향한 충동은 “음모론(conspiracy)”이라는 알레고리적인 서사에게 포획되어 버린다. Fredric Jameson, "Totality as Conspiracy", The Geopolitical Aesthetic: Cinema and Space in the World System,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 pp. 9-35
아니면 스펙터클이 세계에 관한 해석을 전달하고 순환시킨다. 스펙터클은 우리 시대의 물신적인 총체성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사유를 지배하는 것은 거대서사와 계몽적인 이성이 아니라 물신적인 총체성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재현하려는 꿈 자체를 포기할 필요가 전연 없다. 반대로 그런 총체적인 재현에의 꿈을 물신적인 총체성에 양보하지 않는 것, 음모론과 스펙터클, 위험사회의 인식론적인 도구들에게 세계를 사유하는 권한을 주지 않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시대의 기분을 노동이라는 범주와 연결하려는 것은 그런 발상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시대의 기분을 통해 어렴풋이 시대를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대의 기분으로부터 시대를 향한 인식으로 도약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노동이란 범주를 경유하여야 한다.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삶의 활동을 매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인식한다는 것은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을 재전유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노동의 종말이나 노동의 소멸을 주장하는 우리 시대의 주장들은 노동이란 매개자를 저주한다. 제레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이영호 옮김, 민음사, 1996
더 이상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로부터 가치가 생산된다는 지식정보자본주의론 등은 노동이란 범주를 추방하고 새로운 매개자로부터 자본주의사회의 총체성을 재현하려 한다. 피터 드러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이재규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따라서 노동은 소실매개자(vanishing mediator)가 되었다. Fredric Jameson, "The Vanishing Mediator; or, Max Weber as Storyteller", The Ideologies of Theory : Essays 1971-1986 Vol. 2, pp. 3-34
물론 노동이란 범주를 저주하고 추방함으로써 자본주의사회에 관한 새로운 재현을 추구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후기산업사회론을 비롯한 여러 담론적 기획은 한결같이 노동을 지나간 산업사회에 속한 것으로 처분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노동이 사라지거나 종말을 거둔 것이 아니라 노동을 규정하고 전유하는 새로운 권력이 등장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종래의 자본이 노동이라고 규정했던 노동의 정체성은 종말을 거두었다. 이에 우리는 연연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노동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노동을 전유하고 지배하는 자본의 권력은 노동에 관한 새로운 표상을 생산하고 그를 통해 노동과 노동하는 주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핵심 역량 혹은 인재와 주변의 노동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주체는 특별한 장소의 은유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예컨대 주변이라는 공간의 은유를 통해 탈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주체를 그려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공간의 배치는 중심과 주변의 차이를 지우기 때문이다. 벨리디안(Belidian) 사회란 말이 있다. 벨기에라는 가장 부유한 사회와 인도라는 가장 빈한하고 참담한 사회가 이제는 한자리에 모여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벨기에와 인도를 합성한 말이 벨리디안이고 벨리디안은 도처에 있는 사회이다. 로스엔젤리스도 벨리디안이지만 캘커타도 벨리디안이다. 전지구적인 이동을 즐기는 비즈니스맨을 위한 휘황한 컨벤션센터와 국제 수준의 호텔과 레스토랑이 모여있는 재개발 타운이 있고 동시에 벌거벗은 가난에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동냥을 다니는 슬럼이 한 곳에 있다. 따라서 지정학적인 구분으로서의 중심과 주변은 뭉개진다.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에는 중심과 주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바깥이 있다. 전지구적인 화폐와 정보, 생산의 네크워크 안에 통합되어 있는 내부 그리고 그 바깥에 놓인 사막으로 변해버린 외부, 혹은 보이지 않는 곳.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제국?,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
한편 문화적 은유로서의 주변 역시 효력을 잃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주변에서 비롯되는 기분은 우울일 것이다. 중심을 향한 혐오와 회의로부터 주변은 움직이고, 우울은 냉소와 회의를 생산한다. 아이러니와 풍자는 우울에서 비롯되는 태도이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우리는 중심을 조롱하고 전복할 수 있는 반항적인 가치를 얻어내곤 했다. 중심의 권력과 태도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주변에서 나왔다. 그렇지만 지금 그런 문화적인 특권을 지닌 주변은 어디에도 없다. 주변의 감성을 집약하던 “쿨(the cool)”이 겪은 운명이 아마 이를 극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쿨이란 거칠게 요약하자면 자본주의 도시에서의 정상적이고 규격화된 삶을 향한 환멸과 냉소, 그로부터 비롯된 삶의 형태이자 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데이비드 로빈스, 딕 파운틴, ?세대를 가로지르는 반역의 정신 COOL?, 이동연 옮김, 사람과책, 2003
그러나 지금 그 쿨은 전지구적인 마케팅, 홍보, 광고를 통해 존재한다. Thomas Frank, The Conquest of Cool: Business Culture, Counterculture, and the Rise of Hip Consumerism,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7
고객욕구조사를 하던 자본주의는 이제 새로운 마케팅과 광고의 테크닉을 개발하고 있다. “국민 소비자”를 대상으로 앙케트를 하거나 성별과 연령, 인종, 소득에 따라 구별된 인구학적인 집단의 욕구를 따르던 자본주의는 이제 취향과 소비의 규범, 라이프스타일을 수집하고 분석한다. Don Slater, Consumer Culture and Modernity, Cambridge, Polity Press, 1997
고정되고 안정된 인구학적인 분류 혹은 덩어리는 없어지고, 더 이상 평균(혹은 그 이상이나 이하)이란 척도로 측정할 수 없는 흐름만 있는 듯이 보인다. 이 모두는 소통의 네트워크를 통해 작동한다. 결국 우리는 주변의 감성과 의식으로서 쿨에 관하여 말할 수 없다. 문화적 은유로서의 주변은 숨가쁜 유행과 라이프스타일, 소비규범을 강박적으로 쫓고 모방하는, 질식할 듯이 밀폐된 소비의 스페터클 안에 흡수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변에서의 삶이 사라졌다고 여겨야 할까. 그러나 주변이란 용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주변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시대의 삶을 재현하는 도구로 자리 잡는다. 우리는 주변이라는 위치가 차지하는 새로운 자리는 노동이란 개념을 통해 조명될 수 있다. 노동을 재현하는 다양한 담론 안에 주변이란 개념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핵심 역량(core competency)과 주변 인력이라는 구분을 도입하는 경제학, 경영학 담론이나 “한 명의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인재경영론같은 통속적인 매체 담론은 모두 핵심과 주변의 이분법을 도입한다. 구직과 채용에 관련된 기관과 기업, 교육, 직업훈련에 연계된 학교와 기관, 기업에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노동의 표상 역시 언제나 인재와 주변의 이분법을 동원한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며 구직자를 향해 조언과 충고를 쏟아내는 리쿠르팅 회사와 대학교의 취업상담실, 지식강국이 되어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는 인적자원개발계획을 마련해야 하며 핵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국가 기구나 정책연구기관, 기업연구소들. 이 모두는 노동을 둘러싼 재현을 생산하고 그 안에는 핵심과 주변의 은유가 가로지른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노동의 재현에 등장하는 핵심과 주변은 무엇이고, 이 안에 등장하는 주변이란 무엇일까. 또한 이는 불안이라는 우리 시대의 기분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
인재라는 담론은 노동하는 주체와 관련된 다양한 재현을 응축한다. 노동하는 주체의 능력에 관한 재현은 “자격(qualification)에서 역량(competency)으로” 바뀌었다. 노동하는 주체를 지배하는 권력의 재현 역시 “통제와 명령에서 동기부여(motivation)와 몰입(commitment)으로” 바뀌었다. 노동하는 주체와 그의 활동의 질 그리고 그 결과를 연결하는 재현 역시 바뀌었다. 예컨대 임금과 보상을 가리키는 용어와 개념들이 바뀌었다. 능력주의와 성과주의로의 이행, 연봉제를 비롯한 새로운 임금체계의 등장과 확산은 모두 그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모두는 한국 사회에서 독특하게 강조되고 있는 인재론 혹은 인재경영의 담론 안에 집약된다. 이미 1990년대를 전후하여 기업 경영을 둘러싼 담론에서 인재 혹은 인재경영이란 말은 상투어구가 되었다. 삼성 그룹의 경우 경영 목표를 인재 경영이라 천명하고 인재론이라는 새로운 노동의 담론을 선취하고 또 확산시켜 왔다. 이는 그즈음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새로운 경영학 담론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톰 피터스나 피터 드러커, 짐 콜린스같은 경영학자들의 저작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책들은 한결같이 노동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제안했다. <포브스>나 <이코노미스트>같은 외국의 경제 및 경영 관련 잡지들을 비롯하여 국내의 대중매체들을 통해 유포된 새로운 노동의 재현 역시 이를 거들었다. 지식근로자, 상징분석가, 골드칼라, 프리 에이전트, 변화촉진자, 창조적 계급같은 개념들이 노동하는 주체에 관한 새로운 표상이자 규범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인재, 혹은 핵심 역량 등의 개념과 교환될 수 있는 것들이다.
노동하는 주체에 관한 새로운 재현은 자본주의사회의 변화를 재현하는 새로운 담론과 대응한다. 이는 알다시피 “지식정보자본주의” 이 역시 무형의 경제, 네트워크경제, 탈조직자본주의, 미적 경제(혹은 체험의 경제), 창의적 경제 등 다양한 이름을 걸치고 등장한다. 그러나 이 모든 개념은 강조점을 달리 할뿐 모두 수렴한다.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세히 다룰 수 없겠지만, 지식정보자본주의론은 노동에 관한 새로운 표상을 산출한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인재란 개념과 다르지 않을 지식근로자란 개념일 것이다. 지식정보자본주의론의 요점은 새로운 경제체제에서 무엇이 가치를 낳는가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관한 지식정보자본주의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답변은 분명하다. 기존에 가치를 생산하던 것이 노동이었다면, 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과 그것이 축적된 기계와 설비를 비롯한 생산수단이었다면, 이제 가치는 지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기존의 산업 부문(농어업이나 제조업)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추가함으로써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면 지식과 정보 여기에는 심미적인 체험, 라이프스타일 등을 망라하는 정서적이고 상호주관적인 생산물 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스포츠 용품 회사는 도전 정신이나 승부의 경쟁심, 유희적인 기분, 이국적인 쾌감 등을 생산해냄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높인다는 식이다. 또한 보살핌(caring)과 관련된 지식과 서비스를 덧붙임으로써 기본의 서비스산업은 지식정보화된다고 주장된다.
그 자체로부터 가치를 생산(정보통신산업이나 생명공학산업, 금융 및 방송연예산업 등)해 냄으로써 새로운 성장과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노동을 둘러싼 표상 역시 바뀌게 된다. 지식정보자본주의론이 노동에 관한 새로운 표상을 위해 생산해낸 개념적인 쌍생아는 지식근로자이다. 지식근로자란 바로 그 가치를 생산해내는 노동의 주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지식근로자는 특정한 직업적인 주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핵심기술을 지닌 엔지니어와 과학자, 소프트웨어 개발자, 경영컨설턴트, 펀드 매니저, 디자이너, 광고기획자, 영화감독 등의 새로운 직업적 주체들은 흔히 지식근로자이자 인재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들만이 지식근로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심각한 조롱을 받았던 지식근론자론의 변종인 “신지식인”론이 가리키듯이 그것은 모든 주체를 포함하는 담론이다. 신지식인론은 지식기반경제로 이행하고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제시된 새로운 시민적 정체성 혹은 시민(citizenship)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를 주동했던 김대중 정권은 역설적이게도 그 개념이 제시하고 있는 자율적이고 자기책임의 개인이라는 규범에 거스른 채 국가동원의 캠페인이란 형태를 쫓음으로써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또한 신지식인을 경제적 주체로 환원하는 듯한 인상을 줌으로써 그것이 새로운 탈국민적인 시민 혹은 어떤 이의 개념을 빌자면 유연시민성(flexible citizenship)을 구성하려던 기획으로부터도 이탈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신지식인론과 함께 법석스럽게 진행되던 보수 언론사들의 지식강국캠페인 등이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지식인론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시적으로 국가의 교육 및 경제 정책의 변화(인적자원개발계획, 평생학습사회 구축, 생산적 복지로의 개혁, 지방분권화를 통한 기업가적 지역경영 등)에서부터 미시적으로는 기업의 구조조정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신경영전략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지식경영, 품질경영, 가치경영 등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기업조직은 다양한 경영을 둘러싼 새로운 기술과 제도, 관행을 실천하여왔다. 그렇지만 이는 단순히 생산성과 효율성, 합리성을 높이기 위한 자본의 실용적인 선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함은 물론 개인들이 자기와 맺는 관계, 그리고 경제적인 주체와 다른 사회적 주체성의 형태(예컨대 시민이라는 정치적 주체성) 사이에 놓인 관계 역시 변형시키는 기획이었기 때문이다.
에서부터 “아침형 인간”으로 정점에 이른 이른바 자기계발의 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스며들었다. 따라서 신지식인론에서 자기경영(self-management)의 주체에 이르는 일련의 연속체는 변화된 자본주의사회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태라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노동하는 주체의 불안
말하자면 지식근로자란 기업조직에 속한 특정한 부류의 집단 혹은 개인을 가리키지만 더불어 기업조직 나아가 시민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주체성에 관한 재현을 아우르는 패러다임적인(paradigmatic) 기능을 한다. 인재나 핵심 역량같은 개념은 기업조직에 속하든 아니면 그 외부에 있든 모든 이들의 삶을 규정하는 효력을 발휘한다. 우선 인재와 핵심역량은 노동의 능력을 둘러싼 재현을 바꾸어낸다. 이는 흔히 자격에서 역량으로의 변화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격이란 쉽게 말하자면 자격증, 학력같은 것이며 그 안에 전제된 특정한 지식을 가리킨다. 그 지식이란 형식적으로 규정하고 반복적으로 생산될 수 있는 지식과 행위의 규칙, 코드를 가리킨다. 이는 주로 읽고 쓰고 셈하는 지식의 형태로 전달된다. 이를 지식정보자본주의에 관련된 담론들은 각자 나름대로 형식지, 명시지, 공식지라고 부른다. 이와 대별되는 새로운 지식은 “암묵지(tacit knowledge)"란 개념으로 대표된다. 언어나 공식, 시각적 표상처럼 언어적으로 표상할 수 없지만 노동하는 주체 안에 체현되어있는 비공식적인 솜씨와 기술, 감정과 태도 등을 가리켜 암묵지라고 부른다. 이는 마이클 폴라니의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따온 것으로 폴라니는 형식지(explicit knowledge)와 암묵지를 구분하며 기존의 철학적인 인식론이 형식지만을 특권화하고 있음을 비판한 바 있었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참조하라. 마이클 폴라니, ?개인적 지식-후기비판적 철학을 위하여?, 김봉미, 표재명 옮김, 아카넷, 2001. 또한 지식경영 혹은 지식창조기업이란 이름으로 형식지와 암묵지를 노동과 노동능력에 관한 새로운 모델로 제안하여 엄청난 영향을 끼친 다음의 두 일본 경영학자의 저작 역시 참조하라. 노나카 이쿠치로, 히로다카 다케우치, ?지식창조기업?, 장은영 옮김, 세종서적, 1998
이들은 과거의 경제에는 학교를 통해 배운 지식으로 평생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지식과 정보의 급격한 혁신과 변화가 이뤄지는 지금에 그것은 쓸모가 없어졌거나 가치가 저하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팀체제론이나 전사적인 품질관리, 식스시그마, 고성과작업장, 학습조직 등의 모습으로 잇달아 등장했던 노동과정의 관리 담론들 역시 이런 능력의 담론과 상관한다. 그것은 노동하는 주체에게서 협동, 주도성, 창의, 혁신 등과같은 비공식적인 지식을 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장치와 지식, 기술을 강조한다.
일본식 경영, 초우량기업, 위대한 기업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 최근의 경영 기법에 관한 담론들 역시 기업조직에 관한 담론이면서 동시에 노동하는 주체의 정체성에 관한 담론을 만든다. 그것은 노동하는 주체의 다양한 삶의 능력을 자본의 편에서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다양한 테크놀로지(측정, 평가, 교육 훈련의 모델 등)를 포함한다. 결국 인재 혹은 핵심역량이 지배하는 노동은 당연히 그동안 익숙하게 여겨왔던 시간에 따라 분절된 노동, 기계를 다루고 근력이나 지식을 적용하는 노동이 아니다. 네그리와 하트의 표현을 빌자면 이제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이 지배하는 것은 비물질적인 노동, 정서적인 노동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탈근대화, 생산의 정보화”, 앞의 책
또한 노동시간 동안에 이뤄지는 직접적인 활동이 아니라 그들이 삶 속에서 만들어내는 지성과 정서, 지각과 습관 등이다. 마우리치오 라차라토같은 이태리의 자율주의 철학자는 이제 자본은 노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배한다는 뜻에서 노동이란 개념을 버리도록 주장하기도 한다. 노동하는 주체의 정신적, 물질적 능력의 집행만을 강조하고 고용된 시간과 장소(작업장, 노동시간)에서의 노동만을 특권화하는 노동이란 개념을 버리고 "정신의 협력(cooperation between minds)" 혹은 삶의 무한한 잠재성(virtuality) 등의 개념을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자본은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불되지 않는 삶의 힘(biopower) 자체를 전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Maurizio Lazzarato, “From Capital-Labor to Capital-Life”, Ephemera-theory & politics in organization, vol. 4, no. 3, pp. 187-208. 이 글은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다. http://www.ephemera.org
따라서 인재와 핵심역량은 생애 전체에 걸친 능력의 습득과 향상을 강조하고 노동하는 주체를 모든 주체에게 확장한다. 따라서 그것은 고용관계에 놓인 노동자뿐 아니라 모든 주체들이, 능력있는 삶, 성공하는 삶을 위하여 평생 감당해야하는 의무이다.
두번째로 인재와 핵심역량이란 개념은 노동을 관리하고 지배하는 권력에 관한 재현 역시 변화시킨다. 가상 기업이니 네트워크 조직이니 나아가 1인 기업이니 하는 개념들은 모두 이런 변화를 반영한다. 지식기반정보사회를 주장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관료주의를 타도하고 창의성과 자율성을 죽이는 조직을 붕괴시키자고 주장한다. 아마 이 분야의 가장 대표적인 이데올로그는 누가 뭐래도 톰 피터스(Tom Peters)일 것이다. 그는 ?초우량기업의 조건?이란 이름의 저서로 20세기 후반 최고의 경영학 분야의 스타가 된 이후 혁신, 해방, 혁명, 혼돈 등의 파격적인 개념을 동원하여 기업과 일터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잇달아 생산하여 왔다. 그에게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가 직장인과 같은 노동하는 주체의 표상을 완전히 제거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자기(self)”에 관한 이야기만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우리는 자신을 고용된 직장인으로 여겨서 안되며 1인기업(가)의 자유계약, 노동자가 아닌 브랜드를 가진 나의 자기고용(self-employment)이란 형태의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국내에 유행하고 있는 많은 자기계발담론들이 공통적으로 참조하고 있거나 모방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톰 피터스는 푸코의 표현을 전용하자면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자기의 배려(care of self)”의 에토스를 경제적인 주체성으로 변환시키는 우리 시대의 윤리학자라 할 수 있다. 그의 저작은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어있다.
기업이 위계적이고 관료적인 조직체계를 통해, 표준화되고 파편화된 업무의 지시와 명령을 통해 운영됨으로써 노동하는 주체의 자율성과 자기실현의 욕구를 억압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재나 핵심역량은 곧 그런 능력이 발휘되고 조성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계와 조직형태 등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달리 말한다면 인재와 핵심역량은 권력관계에 관한 새로운 재현을 생산한다. 여기에서는 이제는 아무런 저항 없이 사용하는 일반 용어가 되어버린 리더십(leadership)이란 개념을 가지고 설명해 보기로 하자. 리더십이란 개념은 명령과 통제를 행사하는 감독자, 경영자, 관리자 등의 표상을 대신하며 일약 부상한 개념이다. 리더십은 기업 조직 안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관계를 규제하는 권력에 관한 담론이지만 종래의 권력의 표상을 제거한다. 그것은 명령이 없는 권력, 규범이 없는 권력의 모습을 취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기존의 권력에 관한 재현을 아우르고 있던 규범화시키는 권력(norminalizing power) 혹은 훈육의 권력(disciplining power)과 단절한 새로운 권력의 재현이 노동의 세계에 출현함을 볼 수 있다. 이런 새로운 권력의 등장을 분석하며 탈근대 자본주의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푸코가 말한 훈육사회란 개념으로 부족하며 통제사회(society of control)란 개념이 요구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질 들뢰즈, “추신: 통제사회에 관하여”, ?대담 1972∼1990?, 김종호 옮김, 솔, 1993
지시하고 명령하는 권력은 집단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를 상대하고 그들을 규범(norm)에 복종하도록 하며 그에 따라 정상과 일탈, 과오를 측정하였다. 그러나 이제 일터에서의 권력은 자신이 규범을 제정하고 타율적인 명령을 통해 자신을 행사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이제 권력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개인의 힘과 그런 의지를 유혹하고 고무하는 외부의 힘이 결합하고 소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리더십을 둘러싼 담론들은 이제 리더란 개인 스스로 동기를 만들어내고 창의성을 발휘하며 몰입하도록 만들어내는 주체여야 함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리더십론은 앞서 말했던 노동의 능력을 창출하고 지배하기 위한 권력의 담론이다. 그것은 조직의 구성과 배치, 업무의 설계와 조정, 의례와 퍼포먼스의 상연 등을 통해 노동하는 주체로 하여금 스스로를 변형하도록 요구하고 유혹한다. 그러나 이 역시 기업 조직에 속한 노동자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성공하는 자기, 행복한 자아, 자기를 실현하는 주체란 새로운 주체성의 표상과 결합되고 모든 사회적 주체에게 적용된다. 셀프-리더, 셀프-매니지먼트, 퍼스널 브랜드 등은 모두 이를 반영하는 개념들이자 테크놀로지이다. 자신을 향상시키려는 의지는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말이고,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을 지배하고 지배받는 주체로 만들어내는 권력을 작용시킨다는 말이다.
세번째로 노동의 평가와 보상에 관한 담론 역시 바뀐다. 이는 익히 들어왔던 성과주의, 능력주의 등에 근거한 새로운 평가 체계 그리고 연봉제로 요약되는 보상 체계를 통해 나타난다. 그것은 생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기법이기도 하지만 또한 노동하는 주체를 둘러싼 새로운 재현을 만들어내는 담론이기도 하다. 최근의 노동을 둘러싼 지배적인 담론은 인재와 핵심 역량은 거액의 연봉과 파격적인 근무 조건을 누리며 일에서 무한한 기쁨과 자신을 실현하는 즐거움을 만끽한다고 역설한다. 평생직장의 시대에서 평생직업의 시대로 바뀐 지금 노동하는 주체들은 포트폴리오 인생이 되어 자신을 평가하고 인정하며 자신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목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난무한다. 많은 신경제 담론은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주체의 모습을 압축하는 모델은 “프로스포츠선수”라고 즐겨 말한다. 프로스포츠선수는 자신의 투혼과 열정을 발휘하며 자신을 실현하는 쾌감을 맛보고 이를 연봉에 반영한다. 그리고 그는 자유로운 계약자가 되어 팀을 전전한다! 따라서 노동의 평가와 보상에 관한 담론 역시 노동하는 주체를 새롭게 재현한다. 이번에는 인재와 핵심 역량은 프로스포츠 선수와 겹쳐지고, 노동의 평가와 보상을 가리키는 연봉, 능력, 성과 등의 개념은 다시 노동하는 주체에 관한 새로운 재현과 겹쳐진다.
주변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 노동과 총체성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주체를 둘러싼 담론 속에서 주변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그것은 모든 주체의 자리에 있다. 자신을 향상시키고 변화시키려는 데 주저한 사람, 평생에 걸친 직업생애 동안 요구되는 학습과 변신을 게을리 한 사람, 타인과 소통하고 그를 자신의 편으로 삼기위한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한 사람 그 모두는 낙오자이며, 패배자이고 또한 주변의 존재이다. 따라서 주변에 속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인재의 잠재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주변의 씨앗을 품고 있다. 결국 모두가 불안하며 모두가 기괴한 흥분에 사로잡혀 자신을 표현하고 제시하려는 충동에 시달린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기분인 불안은 우리 모두를 조울증에 사로잡힌 주체로 만들어 버린다. 열정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키려는 의지에 현혹되어 있는 나 그러나 끊임없이 무한경쟁에 낙오될 수 있으며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해야 하는 나. 이런 불안한 주체의 모습은 곧 탈근대 자본주의사회가 자신의 노동하는 주체를 생산해낸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이런 불안한 나 혹은 자기(self)의 주체성은 동시에 노동자의 주체성이자 학생의 주체성이며 국민의 주체성이다. 최근 육군본부는 “군 자기계발 시범사업”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현역병들은 지적탐구와 경력개발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배움, 문화, 가족 등으로부터 단절되므로 국가의 미래를 이끌 중요한 인적자원인 이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양성할 방안이 필요하다는데 전경련과 軍이 인식을 함께 하여” “재계, 군과 손잡고 軍 인적자원개발에 함께 나서”, 전경련 보도자료, 2004, 10, 14.
그 사업을 출범시키게 되었다고 한다. 사업의 내용은 어학과 자격, 소양(비즈니스 교양 등)과 경영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인재 혹은 핵심 역량이 되기 위해 실천하는 주체 혹은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또한 군인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는 매우 흥미롭다. 군대는 훈육사회의 요람이자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군대 또한 탈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주체성을 생산하는 공간으로 흡수되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감옥과 복지수용시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의 공간, 모든 삶의 주체는 이런 주체성의 범형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노동하는 주체와 시민적 주체 그리고 자신을 돌보는 자아를 연결하던 이전 시대의 매트릭스는 새롭게 바뀌었다.
가족에서 직장으로, 학생에서 노동자로, 정상인에서 감옥으로 이동하며 각각의 분할된 공간에 그러나 각각의 동종적인 훈육의 권력에 복종하던 우리의 삶은 이제 미분화된 삶의 흐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훈육의 권력이 낳은 우울의 기분은 이제 탈근대 자본주의가 자신의 주체성에 부여한 불안의 기분으로 변형되었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중심과 주변은 불안이란 감정 안에 겹쳐져있다. 불안은 자신의 주변으로의 몰락을 두려워하는 공포 그리고 거꾸로 인재와 핵심 역량, 스타 플레이어와 초우량 퍼스널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들뜬 흥분 사이로 소용돌이친다. 그렇다면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그것은 탈근대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성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체성의 모습을 그려내려는 작업은 무엇보다 빈사상태에 이른 노동 그리고 노동하는 주체라는 매개자를 되살려내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더 이상 과거의 함축과 다른 것이겠지만 그리고 더 이상 과거의 주체들과 다른 주체의 모습이겠지만, 그것을 발견하고 해석하려는 작업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총체성을 그려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총체성을 매개하는 노동을 되살려낼 수 있을 때, 결국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인지적인 지도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도를 발견함으로써 불안에 표류하는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 http://www.homopop.org/log/index.php?pl=91
마치 사회과학 개론 교과서처럼 (딴에는) 아무리 쉽게 써놓았어도 녹지않은 설레임처럼 아무리 힘들여도 읽히지 않는 글들이 있는 반면, 독자를 그닥 배려하지 않아보이는, 난해한 단어를 줄기차게 쏟아내더라도 편하게(?) 읽히는 글들이 있다. 이글도 그러한데, 아마도 정확하게 나에 대한 이야기라서 일지도, 특히나 '핵심 역량'으로서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지식노동자-어쩌면 사회복지관료!-가 되기가 기대되는 서울대학생으로 말이다. 얼마전 학교에서 있었던 채용박람회에서 책자 하나를 슬쩍 해온것도, 이런 불안한 기분의 발현일지도 모를일. 끊임없이 핵심, 중심을 걸러내는 수많은 기제속에서 부대끼면서 대학이란 공간에 들어왔지만, 그 공간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과정이 아니었던가. '자본주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낙오에 대한 공포로 돌아간다'라고 했던 예전 나의 인식이 아주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떠한 시도도 조롱당하는, 냉소가 슈퍼마켓에 진열된 시대에, 그것을 정면돌파하려는 저자의 태도도 인상깊다.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런지.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총체성을 그려내는 것은 비웃음의 대상이 될게 분명하다. 알다시피 우리 시대에 가장 비웃음거리가 된 개념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그것은 총체성이란 개념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사유를 지배하는 것은 거대서사와 계몽적인 이성이 아니라 물신적인 총체성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재현하려는 꿈 자체를 포기할 필요가 전연 없다. 반대로 그런 총체적인 재현에의 꿈을 물신적이 총체성에 양보하지 않는 것, 음모론과 스펙터클, 위험사회의 인식론적인 도구들에게 세계를 사유하는 권한을 주지 않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Posted by 아이스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