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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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이 많은 쇠고기를 즐기는 영국인의 입맛은 역사상 처음으로 두 가지 위대한 농업 전통을 하나로 합치도록 했다. 하나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최초의 위대한 곡물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곡식 생산 물화이고, 다른 하나는 유라시아 스텝 지방의 말을 탄 유목민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위대한 목축 문화가 그것이다. 두 위대한 농업 시스템은 대초원의 울퉁불퉁한 방목지와 중서부의 평평한 농경지가 마주치는 미서부 평원에서 처음으로 결합되었다. 20세기 대다수 인류의 식생활 습관과 역사의 행보를 변화시킨 영국 은행업자들과 미국 목축업자들 간의 역사적 거래가 바로 그곳에서 맺어졌던 곳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뿔 달린 오록스 후손인 스페인산 소는 서부 평원에서 중서부 농장 지대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육질에 지방이 들어찰때까지 기름진 옥수수로 살을 찌웠다. 그런 다음 고기는 철도와 증기선을 통해 영국 항구로 이송되어 영국인과 유럽인의 식탁에 올랐다.
 오늘날 미국의 경우 농경 지대에서 생산된 곡물의 70% 이상이 가축들, 특히 소의 사료로 공급되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전체 곡물의 3분의 1이 소 및 다른 가축의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목초와 곡물, 즉 목축과 농경이 축산 단지에 집중된 것은 20세기 현대 사회와 생태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3p

 곡물로 사육되는 축산 단지는 인간의 사회적 역학 관계에서도 모든 사회적 단계의 밑바닥에서부터 근본적인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 이제는 생존 그 자체, 누가 먹고 먹지 않느냐, 지구상에서 이용 가능한 수백만 에이커의 땅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하느냐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122p

 새로운 조합 공정으로 소를 도살하고, 절단하고, 세척하고, 손질하는 속도는 가히 획기적인 수준이었다... 훗날에 헨리 포드는 "자신의 자동차 조합 공정에 대한 발상은 쇠고기를 손질하는데 사용되는 시카고 포장공장의 궤도 장치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회고했다.
 도축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사람을 대신하는 기계의 도입과 더불어 국가적으로 새로운 현실이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적인 살생에서 벗어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량 도축 과정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최초로 기계가 사용되면서 사람들은 단순한 인부로 전락하여 그저 조합 공정의 체계와 속도에 맞춰 일하게 되었다. -144p

 부자들의 다이어트와 빈자들의 굶주림 간의 모순, 그리고 단백질 사다리의 최상단과 최하단에 위치하여 갈수록 양극화되는 인류의 모순은 노골적인 이기심과 뻔뻔스러운 실용주의에 그런 대로 인숙해져 있는 현대적인 정서에서도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전자 세계에서는 시간이 동시성으로 압축되고 공간이 '가상 현실'로 줄어들며 글로벌 시장과 글로벌 쇼핑센터를 위해 그 경계선들이 제거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인류는 가장 중요한 경계선 하나를 없애지 못하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먹는 자와 굶주린 자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인공위성 통신, 정보 기술, 첨단 무기, 유전자 공학 기술로 정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도 인류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나뉘어져 지구의 풍부한 유산에 다른 이들이 참여하는 권리를 서로 부정하고 있다. -217p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요리가 문화와 자연의 주요한 매개자라고 지적한다. 오직 인간만이 고기를 요리함으로써 문명과 자연 세계 사이에 근본적인 경계선을 긋는다. 요리에는 '자연이 문화로 변형되며, 요리의 종류들은 항상 차별화의 상징으로서 시의적절하게 사용된다'라는 보편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283p
 그래서 근대의 사람들은 양심의 짐을 덜기 위해 자신들이 잡아먹는 동물들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지도록 고안된 일련의 장벽들을 설정했다. 먹이가 되는 동물들과의 친숙한 관계를 없앰으로써 사람들은 뿌리깊은 연결고리와 생명체의 살해에 흔히 수반되는 공포, 수치, 혐오, 후회의 감정을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연을 자원과 상품으로 변형시켰으며, 나아가 무자비한 기술적 조작과 상업적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연에 기계적인 특성을 부여하여 자연을 객관화시킨 과정을 살펴보았다. 육식 문화에서는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전가시키고, 도살 행위를 은폐하고, 절단 과정을 허위로 알리고, 식사 준비에서 동물의 정체성을 거짓으로 꾸밈으로써 동물과 한층 더 거리감을 둔다 -335p
 도처에 존재하는 햄버거는 현대적은 육류의 마지막 해체를 보여준다. 소는 구별이 되지 않는 물질로 해체되고 고도로 기계화된 과정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한다. 황소는 베이컨이 최초로 자연을 해체하고 변형시켰던 것과 동일한 방식에 의해 '타고난 속성을 잃어버리고 강제적으로 다른 형태를 갖게 되었다'  소는 사지가 절단되고, 내장이 제거되고, 다시 개조되고, 평평하게 다져진다. 그리고는 급속 냉동되고, 운송되고, 차곡차곡 쌓이고, 석쇠에 구워지고, 최소한의 불편함으로 소비될 수 있도록 가지런하게 포장 가능한 크기로 다듬어진다. -3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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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이스티

2008/06/16 03:29 2008/06/16 03:29

[한겨레] 약자의 살을 삼키는 육식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의 ‘식육’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와 동류다.” 성호에게 인간과 만물(동물과 식물)은 동일한 속성을 갖는다. 그 동일한 속성이란 생명이다. 다만 그 생명의 위계는 있다. 곧 인간-동물-식물의 위계다. 위계의 논리는 이렇다. “초목은 지각이 없어 혈육을 가진 동물과 구별되기에 그것을 취하여 살아갈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날짐승ㆍ길짐승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의지를 갖는다는 점에서 사람과 동일하다. 어떻게 차마 해칠 수가 있단 말인가?” 생명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고 불가피하게 다른 생명을 취한다. 식물은 생명이지만, 지각이 없다. 고통을 느끼거나 표현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식물을 취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날짐승ㆍ길짐승은 생명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또 죽음의 고통을 느끼고 표현한다.

인 간은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존재다. 그러니 어떻게 인간과 동일하게 생명의지를 지닌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인간이 동물성 단백질을 원하는 것 역시 생명의지의 소산이다. 동물을 식품으로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호는 생명주의자이지만 대책 없는 생명주의자는 아니기에 동물의 생명을 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물 중에서 사람을 해치는 동물은 이치상 마땅히 잡아 죽일 수 있다. 또 사람이 기르는 가축들은 사람에 의해 길러졌으니, 사람에게 그 생명을 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동물은 잡거나 죽일 수 있다. 당연하다. 또 사람이 키우는 동물, 곧 가축은 본디 먹기 위해 키운 것이니 사람이 그 생명을 취할 수 있다. 역시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이 동물의 생명을 제한 없이 취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성호는 다시 묻는다. “그래, 가축은 그렇다 하자. 하지만 저 산에서, 물에서 절로 나고 절로 자란 것들이 모두 사냥과 고기잡이의 대상이 되는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인가?” 가축이 아닌 자연 속에 나고 자라는 동물의 생명을 인간이 무슨 권리로 빼앗느냐는 물음이다. 다시 말해 사냥과 어업은 과연 정당한 행위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난처한 질문에 어떤 사람이 성호에게 내놓은 답은 이렇다.

  “만물은 사람을 위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다.” 이 이기적 인간중심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성호는 “좋다. 이는 사람의 피를 빨아 먹고 산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를 위해 생겨났다는 말이냐?”라고 반박한다. 이래서 이기적 인간중심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

 “육식은 군자로서도 부득이한 일이니, 또한 마땅히 부득이한 심정으로 먹어야 할 뿐이다. 만약 욕망을 한없이 채우려고 거리낌 없이 살생을 저지른다면, 약육강식의 논리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성호는 이기적 인간중심주의의 원산지를 서양이라고 생각한다. 성호는 어떤 사람이 서양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만물이 모두 사람을 위해 생겨난 것이라면, 저 벌레들이 생겨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서양 사람은 “새는 벌레를 잡아먹고 살이 찌는데, 사람이 그 새를 잡아먹으니, 이것이 곧 사람을 위해 벌레가 생겨난 까닭인 것이다”라고 답하는데, 군색한 답변이다. 성호 역시 ‘이 말 또한 구차한 변명’이라고 지적한다. 그렇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인간은,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저 하늘과 땅과 바다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날짐승, 길짐승, 물속 짐승의 생명을 끊을 그 어떤 권리도 없다.

 유학자인 성호는 이 근본적 물음에 대해 뜻밖에도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자비를 떠올리며 그것이 옳은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육식의 습관 역시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노인의 봉양과 제사, 손님 접대, 병의 치료에 고기를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어떤 한 사람(아마도 석가모니)의 견해로 갑자기 고기를 먹는 습관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육식도 불가피한 것이라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 성호의 결론을 들어보자. “그렇다면, 육식은 군자로서도 부득이한 일이니, 또한 마땅히 부득이한 심정으로 먹어야 할 뿐이다. 만약 욕망을 한없이 채우려고 거리낌 없이 살생을 저지른다면, 약육강식의 논리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육식은 불가피한 것이나 살생은 최소한의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식욕을 채우려는 무분별한 살생을 피하라는 것이 성호의 주장이다.

 성호의 육식론을 꺼낸 것은, 물론 미국 쇠고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뼛조각만 나와도 수입을 금지하던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180도로 바꾼 것을 보면, 앞으로 수입될 쇠고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정부의 설득을 믿고 싶지 않다. 촛불집회를 열고 저항하는 것은 시민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다. 또 그 저항의 불빛 속에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들어 있다. 한데, 내가 주목하는 곳은, 그 존중심이 터잡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이다.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성호의 말처럼 짐승의 생명은 소중하지 않은가. 성호는 가축은 먹어도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가축을 기르는 방식이란 현대의 자본주의적 축산업의 방식이 결코 아니다. 현대의 축산업은 공장이다. 그 공장에서는 한 마리가 겨우 들어갈 공간에 닭을 집어넣고는 부리를 잘라 버리고 전등을 하루종일 켜 둔다. 닭은 오직 알을 낳는 기계일 뿐이다. 짧은 시간에 사료를 강제로 먹여 소와 돼지의 살을 늘린다. 짐승은 젖과 살, 곧 단백질을 공급하는 사물일 뿐이다. 그 사물에는 생명이 없다. 근대 이전의 축산이 이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성호는 인간의 식욕을 채우려는 무분별한 살생을, 강자가 약자의 살을 삼키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란 강자의 횡포를 통탄한다. 하지만 우리 역시 동물에 대해 강자의 횡포를 부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루아침에 모두들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동물의 생명이지만, 생명을 오로지 이윤만으로 보는 자본주의적 축산업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강명관/부산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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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주장으로 현대의 축산업을 정당화 하기엔 육식자본주의의 순환은 너무 멀리 나갔다.

Posted by 아이스티

2008/05/19 22:00 2008/05/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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