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而思] 근대의 표상 ‘사쿠라'
이향철/ 광운대 일본학
지난 해 일본의 젊은 감성파 영화감독 이와이 순지의 ‘사월이야기’를 보았다. 사랑의 시작을 예감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한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직껏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잔영을 드리우고 있다. ‘사쿠라’ 꽃잎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거리의 모습이며 그 속에 그려지고 있는 보기에 그다지 지겹지 않은 일상의 조각들.
필자는 ‘사월이야기’의 주요 촬영무대가 된 동경 쿠니타치에서 10년 가까이 늦깎이 유학생으로 보냈다. 본래 한적한 농촌이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동경상과대학(지금의 히토츠바시대학)이 옮겨오면서 학원도시로 개발된 곳이다. 여주인공이 자전거를 달리던 대학로 양편에 늘어선 아름드리 ‘사쿠라’ 가로수도 그 때 심어진 것이다. 지금 일본 전국에 퍼져 있는’사쿠라’는 대부분 스스로 번식능력이 없는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라는 원예품종으로 유신기에 등장하여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보급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어줍잖게도 정치학, 역사학, 경제학을 넘나들며 내내 붙들고 있는 과제가 하나 있다. 일본에 있어서의 근대적 사유의 성립과 주체적 인격의 확립에 관한 문제이다. 근대적 주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부정적 가치를 타자에게 투영함으로써 자기를 긍정적으로 체현해 나가는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던가. 안으로는 균질적인 공간을 날조하고 밖으로는 차별을 강조하는 논리가 아니던가. 그러나 국가의 주권과 이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데올로기만으로 국민을 하나로 묶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루소의 다소 과격한 표현을 빌리면, ‘국민을 얽어매는 쇠사슬’을 감추고 지고의 가치와 표상을 담당하는 ‘꽃장식’이 필요하게 된다. ‘사쿠라’의 표상은 바로 이러한 꽃장식으로 근대에 들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원예품종 ‘사쿠라’가 보급되기 이전에 일본의 산야에는 잎과 하얀 꽃이 함께 피는 ‘산벚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한국, 중국의 사천성·운남성, 인도와 미얀마의 접경지대 등 동아시아의 온대·난대지역에 널리 식생하는 품종으로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달리 ‘사쿠라’는 잎이 나기 전에 꽃봉오리가 터지고 꽃잎이 많아 온통 나무를 염홍빛으로 물들인다. 특히 꽃잎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낙화광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넘어 처절함이나 비장함마저 느끼게 한다.
명치유신 후 징병제도의 창설과 때를 같이 하여 ‘사쿠라’의 낙화이미지를 무사계층의 죽음의 이념과 결부시켜 군인의 표상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 중심인물은 당시 군부의 최고책임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그를 중심으로 하는 쵸오슈우번 출신의 고급장교들이었다. 청일전쟁의 전몰자를 위령하기 위한 충혼탑에는 ‘산벚나무’보다 꽃잎이 많은 ‘사쿠라’가 식수되어 ‘국가를 위한 아름다운 죽음’의 이미지를 증폭시키게 된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사쿠라’ 보급운동이 전개되어 전국이 온통 원예품종 ‘소메이요시노’ 일색이 된다. ‘군국의 꽃’으로서 ‘사쿠라’의 표상이 완성된 것이다. 법요시 종이를 연꽃의 꽃잎처럼 잘라 뿌리던 ‘散華’라는 말은 언젠가부터 ‘꽃(華)이 지(散)듯’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치는 것을 의미하고 전쟁과 전사를 미화하는 말로 전화된다. ‘사쿠라’는 부국강병을 국책으로 하는 ‘군국의 꽃’으로 1945년의 패전까지 일본의 국민사상에 강렬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일본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된 1932년, 경도제국대학의 코이즈미 겐이치 교수에 의해 ‘사쿠라의 원산지는 제주도’라는 논문이 발표된다. ‘사쿠라 = 군국일본 =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이미지의 확산에 골몰하고 있던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이후 일본의 식물학자들은 온통 이 ‘비국민’ 학자의 학설을 부정하는 데 매달리는 듯 하였다. 한국의 연구자들도 이에 뒤질세라 ‘사쿠라 = 군국일본’이라는 표상을 배제하기 위해 제주도의 ‘왕벚나무’를 일본 ‘사쿠라’의 조상으로 기정사실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대응해 왔다. 식물 하나가 국가나 민족의 논리에 말려들어 이데올로기로 이용당해 온 웃지 못할 이야기다.
모든 비밀은 ‘사쿠라의 나무 밑에’ 감추어져 있을지 모른다. 무국적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와이 순지의 영상미학은 ‘사쿠라’의 낙화장면 하나로 온통 ‘일본화’되는 느낌이다.
출처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734
상징의 정치화, 정치의 미학화
오오누키 에미코(지음), 이향철(옮김),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모멘토, 2004.
조지 L. 모스(지음), 이광조(옮김), <<남자의 이미지>>, 문예출판사, 2004.
피에르 부르디외/장-클로드 파세롱(지음), 이상호(옮김), <<재생산>>, 동문선, 2000.
일본 제국주의 황군의 충실한 주구走狗였던 박정희가 총맞아 죽은 현장에서 노래를 불렀던 탓에 인생이 심하게 꼬여버린 심수봉이 '무궁화'를 부른 것은 참으로 꼬인 일이다. 2절 가사 한 구절을 보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하늘에 산화한 저 넋이여
몸은 비록 묻혔으나 나랄 위해 눈을 못감고
무궁화 꽃으로 피었네
이 노래 가사는 꽃만 무궁화일뿐 일본 제국주의가 카미카제 특공대의 죽음에 덧씌운 사쿠라 모티브를 그대로 재현한다. 더욱이 가사에 들어간 '산화散花'는 옥이 부숴지는 모습을 차용한 옥쇄玉碎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군부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 말은 원래 불교에서 사개법요四箇法要라는 복잡한 불교 법의의 일부로 부처를 기리는 뜻에서 꽃을 뿌리는 것을 가리켰으나 일제 군부는 "이 말의 의미를 불교용어의 본래적 의미와는 전혀 동떨어진 것으로 바꿔 전사를 '(사쿠라)꽃처럼 지는' 것이라고 미화하기 위해 이용"했다. "이 말은 때때로 매스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 대본영大本營의 발표에 널리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도 자신들의 죽음을 산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심수봉이 이런 사정을 알고 불렀건 모르고 불렀건 이 노래는 꽃이라고 하는 자연적 대상이 미적 상징으로 변환되고, 그에 이어 특정한 맥락 속에서 정치적으로 사용되며, 그 역으로는 실제로는 한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을 뿐인 사건을 상징화된 꽃을 매개로 미화하고 그것이 대중에 스며드는 과정에 대한 탐구의 실마리가 될 수 있겠는데, 이때 상징의 정치화 -- 여기에는 미적 대상만이 아니라 기술적 대상도 포함된다 -- 와 정치의 미학화는 선후와 인과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얽힌 복잡한 과정이라 하겠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정치화된 상징의 미적 가치를 내재화한다. 즉 노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면 이러한 수단을 포함하는 상징의 정치화 과정 매커니즘은 무엇일까?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쿠라 '꽃'의 의미가 일본의 현대에 와서 어떤 과정을 거쳐 '천황을 위한 희생으로서 젊은 병사가 사쿠라처럼 진다'는 의미로 고정되었는가", "왜 어떻게해서 개인은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가",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기독교 신자였고 또한 그들 전원이 고학력자였던 유망한 젊은이들이 당시 정부에 대항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게 된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오오누키 에미코의 저작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제시하거니와 그의 답을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문화.사회 제도의 '자연화' 과정과 오인이 이중으로 작용해서 [젊은 병사들은] 전체주의의 지지자가 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본래는 그런 뜻을 가지지 않았던 의미나 가치 등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자연스러운 것'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자연화 과정은 천황제의 개조, 근대적 군대의 구축, 그리고 사쿠라 꽃의 의미 변용 등을 포함한다. 즉 천황제, 군대, 사쿠라 꽃이 본래는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어떤 수단 -- 여기서 사용되는 수단으로는 '전통의 개조', '미화美化 혹은 미적 가치의 부가', '상징적 오인méconnaissance' 등이 있으며, 그에 덧붙여 교육을 통한 상징폭력의 재생산도 거론될 수 있다 -- 을 통하여 그것이 변용되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고,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수용되는지를 살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원래 일본의 "천황은 쌀의 풍작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 신들과 소통하는 능력을 타고난 샤머니즘적 존재였고 천황 자신도 백만에 달하는 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메이지明治의 정치가들은 이러한 천황의 지위를 개조하여 '전능한 신'으로 재창조하였는데 이러한 재창조는 1889년의 대일본제국헌법으로 구현되었다. 다음은 개조된 천황의 지위를 보여주는 헌법 구절들이다.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
제3조 천황은 신성불가침하다.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제1조는 만세일계로써 천황제가 옛날부터 영속하는 제도라고 주장하며, 제3조는 천황을 정치를 초월한 곳에 위치시킴으로써 정치적 책임에서 해방시킴과 동시에 정치가들은 천황을 '손 안에 든 옥玉'으로서 제멋대로 가지고 놀 수도 있었다.
천황제의 재정의 또는 재구축을 위해 사용된 수단은 전통의 개조라는 수단인데 이는 이미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명료하게 지적한 바 있는 현상이다: "정확하게 그와같은 혁명적 시기에, 그들은 자신의 목적에 봉사할 수 있도록 노심초사 과거의 망령들을 주술로 불러내며, 이러한 유서깊은 문장과 차용한 언어로 세계사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기 위하여 과거의 망령들로부터 이름과 구호와 의상을 빌려온다. 그리하여 루터는 사도 바울로 가장하였으며... 이와같은 혁명에서 망령을 깨어나게 하는 것은 과거의 투쟁을 서투르게 흉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투쟁에 영광을 부여하려는 목적"에서이다.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이러한 개조를 통해 천황을 당대의 요구에 필요한 것으로 재구축하였고, 그에 이어 '천황에 충성하는 군대'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었다.
메이지의 '군인칙유軍人勅諭'에서 널리 알려진 구절은 다음과 같다: "세론에 현혹되지 않고 정치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오로지 자기 본분의 충절을 지키며 의義는 산악보다 무겁고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고 각오하라." 죽음은 새털보다 가벼운데 그러한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의로운 일이며, 궁극으로는 천황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함의를 가진 선언을 발표하면서 메이지 정부는 '천황, 곧 국가를 위한 희생'을 이데올로기로서 고무하거나 강제하는 방안을 취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통일된 국체國體를 구축하려 했지만 이에 대해 일본 국민은 오랜 기간을 주저하면서 때로는 강하게 저항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청일전쟁 -- 청일전쟁은 이른바 일본의 근대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청일전쟁 전후 약 십수년간은 일본 자본주의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근대가 과연 제대로 된 근대인가에는 의문이 있다. 자각적 주체적 개인이 아닌 군국주의 신민을 만들어내면서 물질적 산업화의 성과만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근대로 간주해버리면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건설한 공장과 철도도 근대의 '업적'이 될 것이며, 이를 식민지배의 긍정적 성과로 인정하는 식민지적 지식인들은 꽤 된다 -- 과 러일 전쟁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결속하기 시작했고, 국민공동체Volksgemeinschaft에 가까운 것이 형성되었다... 일본 정부는 뜻하지 않은 승리에 취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국민의 심리를 이용해서 애국심을 고양하고 국가비판세력을 분쇄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군국주의의 톱니바퀴에 가속도가 붙어돌기 시작한 것이다."
고조된 자신감과 발전하는 산업이라는 힘을 뒷받침으로 하여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사쿠라 꽃은 군부에 의해 "전사를 미화하기 위한 상징적인 도구로 변용되기 시작한다. 전사한 후에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부활하는, 즉 확 피었다가 지는 사쿠라 꽃처럼 젊은이들은 천황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하지만 천황이 참배 '해주시는' 야스쿠니 신사의 사쿠라 꽃으로 환생한다고 약속한 것이다." 사쿠라 꽃 역시 처음부터 전사의 상징은 아니었다. "원래 야스쿠니 신사의 사쿠라 나무는 그 꽃의 아름다움으로 유신때 목숨을 잃은 막부타도파 지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심었던 것이나 군국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정부에 의해 그 상징적 의미가 변질되어갔다. 지는 사쿠라 꽃은 자기 목숨을 희생한 병사를 표상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와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피는 사쿠라는 전사한 병사가 환생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사쿠라 꽃의 의미변용과정에는 미화 혹은 미적 가치의 부가라는 수단이 사용되었으며, 교과서, 창가, 유행가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해서 권력은 넓은 의미의 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정치화된 상징을 보급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힘의 토대인 권력관계를 은폐한채,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다시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며, 그런 점에 이는 상징폭력의 형성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쿠라 꽃은 점차 '천황, 즉 국가를 위한 희생'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지는 사쿠라 꽃의 아름다움은 젊은이들의 죽음과 동일시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이 극치에 달한 것은 특공작전에서였다. 그런데 그 젊은이들은 과연 자신들의 죽음이 천황을 위한 산화임을 굳게 믿었던 것일까? 특공대원들이 남긴 "수기는 그들이 사상적으로는 천황 중심의 군사적 이데올로기를 재상산하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은 왜 죽음을 택했는가? 이에 작용한 것으로는 우선 '애국주의라는 가면'을 들 수 있다.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애국주의의 가면을 쓰고... 침투해 들어갔다. '천황, 즉 국가를 위한 희생'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있던 사람들조차 사방에서 병사들의 남성으로서의 자부심에 호소하는 정부의 전략 앞에서 그것을 자신들의 애국심의 양식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들을 추동한 또다른 이념은 이상주의였다. "젊은이들은 이상주의의 세계에 둥지를 틀고 인생이나 여성, 사상, 플라토닉한 사랑, 순수함과 미를 추구하였다. 그들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이끈 것은 이러한 이상주의였다... 애국심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인생보다도 위대한 대의에 무조건 헌신하는, 이상주의에 강렬하게 헌신하는 부분이 있었다."
특공대원들은 자신의 죽음이 천황을 위한 것임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삶에 대한 타오르는 욕구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 이외의 선택이 없음을 자각하고 있던 그들에게는 "이론적인 구실"이 필요하였다. 그것이 바로 로만틱한 정서에서 뿜어져 나온 애국심과 이상주의였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그들이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루소나 칸트의 일반의지general will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동경하였다. 그러나 "나치나 일본 국가에 의해 변형된 '총의總意'가 루소나 칸트의 총의로서 표상되면 자신들의 이상과 국가의 이상 사이에 메코네상스가 존재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사쿠라 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쿠라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가운데 깊숙이 자리잡은 '아름다운' 꽃이다. 그러나 이 꽃의 상징적 의미에는 상징적 오인을 촉진하는 다양한 요인들이 갖추어져 있다. 본래 사쿠라 꽃은 삶과 환생 둘 다를 상징했으며, 이 의미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특공대원들 역시 이러한 의미장意味場 속에서 '사쿠라 꽃'을 이해했다. 그러나 군부는 사쿠라 꽃에 의한 상징적 표상의 균형을 변화시켜 죽음을 전면에 내세웠다. 군부가 사쿠라 꽃을 말할 때면 그것은 '천황을 위한 죽음'을 의미했고, 젊은이가 말할 때면 '환생'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의사소통이 결여되어 있었고, 또한 그러한 상태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자의 이해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공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오인은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없이 기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미변용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자신이 좋을대로 해석해 나간다."
남성 이상형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탐구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것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이다. 조지 모스에 따르면 남성 이상형은 "현대사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등장해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의 특공대에도 이러한 남성 이상형은 강한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일본 군부는 젊은이들에게 무사武士의 이미지를 그대로 투영시킨 남성상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18세기 서구에서는 빙켈만 등의 영향으로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에 근거를 둔 남성성의 육체적 기준이 성립되었으며, 이에 덧붙여 라바터 등의 노력으로 관상술이 발전하였다. 또한 영웅주의와 죽음, 희생과 같은 남성성의 정신적 기준도 마련되었다. 이러한 남성성의 두 축면은 '공격적인 남성성'으로 집약되는데, 이것은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사회적인 기능을 얻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은 민족주의의 공격성을 예리하게 벼렸고, 전사로서의 남성을 국민성 추구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에른스트 윙어Ernst Jünger 등은 '영원한 전쟁', '전사' 이데올로기를 전파했으며, 이는 첨단 테크놀러지 숭배와 결합되었다. "전쟁은 남성성의 상징"이었으며, "진정한 남자는 숭고한 대의에 복무해야 한다는 의식이 늘 존재했다. 대의를 위한 희생은 이제 남성성이 감당할 수 있는 최상의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로부터 '파시스트 전사'가 출현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파시스트 남성의 출현과 함께 현대 남성성의 역사는 정점에 이르렀다. 남성성이 이렇게 고양되었던 일은 전무후무했다. 국가의 상징으로서, 살아있는 표본으로서 파시스트 남성에 투영된 희망은 모든 파시스트 정권에서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여기서 남자다움은 일상생활을 초월하는 원리였다. 하지만 파시즘이 새로운 남성성을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 남성의 여러 측면을 확장하고 미화했을 뿐이다." 사쿠라 꽃과 마찬가지 사태가 '남성성'에 일어났다. 특히 나치는 '남성성'을 사회적 규범으로까지 확장시키고 그것을 인종주의와 결합시켜 학살을 정당화했다. 남성다움의 실현이 현실에서는 곧 인간성 말살을 낳아놓은 것이다.
상징기호는 본질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상징을 매개로 한 의사소통에서는 반드시 오인이 일어난다. 이러한 오인은 상징기호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문화적인 것에서는 항상 일어난다. 박정희 시대의 '국민교육헌장'에는 '민족'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오늘날의 한민족주의자들의 '민족'과 같은 의미인가. 그리하여 박정희의 '민족중흥론자'와 '한민족[패권]주의자'들은 한 패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계급을 초월한 민족공동체'를 주장하는 사회운동과도 접점을 가질 수 있는가.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애국심'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이념인가. 21세기 자본주의 국가에서 과연 애국심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적 인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사용되는 이러한 상징 기호들은 로만틱한 열정에 호소할 뿐이다. '지금, 여기의 나'의 구체적 삶과는 무관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해군들이 즐겨 불렀고, 나중에는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던 '두 송이의 사쿠라'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너와 나는 두 송이의 사쿠라
뿔뿔이 흩어져 진다 해도
사쿠라 꽃이 피는 토오쿄오의 야스쿠니 신사
봄날 가지 끝에서 꽃으로 피어 만나자꾸나
그들이 꽃으로 피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알 수 있는건 딱 하나, 그들의 죽음이 개죽음이었다는 것 뿐이다.
출처 : http://armarius.net/ex_libris/archives/0002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