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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민, 『제국의 렌즈』 2010

 옛날 사진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우리나라 왕은 왜이리 사진이 간지가 나지 않을까? 였다. 황제라는 지위에 합당할만한 위엄, 풍채가 느껴지지 않는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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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시선, 제국의 렌즈에 포착된 황제들의 모습. 아마 종전 후 패전국의 황제에게 렌즈를 들이대었던 서양인들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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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객관적'인 것이라고 믿어진다. 현실을 그대로 렌즈에 담아 표상하는 것. 그림이나 이야기와 다르게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우리는 스스로의 신원을 증명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하지 않는가. 또 이미지는 시공간, 언어의 장벽을 넘어 소비될 수 있다. 일본에서 찍은 사진을 보기 위해 일본어를 배울 필요도 없으며, 사진의 프레임 안에 있는 장면들을 쉽게 소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진은 그 현실이 있었던 맥락으로부터 탈출한다. 사진기의 렌즈 뒤편에 서있는 사람,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인가, 또 왜 이러한 사진을 찍었는가? 사진이 포착한 한 순간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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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히 과거의 모습을 보는 것에 있어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연설 중의 제스쳐를 포착하여 '막되먹은 대통령'의 이미지를 만드는 언론의 선전술은 이와 맥을 같이한다.

 서구의 제국주의 확대 과정에서 외교관, 학자, 여행가, 선교사 등 다양한 목적으로 동양을 찾은 수많은 서양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그들이 방문한 곳에 대한 정찰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더욱이 사진술이 발명디면서, 서구의 여행사진가와 탐험사진가들이 장차 그들의 식민지가 될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과 같은 이국땅에 가서 막대한 숫자의 사진을 촬영해왔으며, 결국 그 사진들은 정찰의 임무뿐만 아니라 대상 지역에 대한 다양한 시각적 정보로서 제국에 제공되었다. 이렇게 축적된 사진을 통한 시각적 지배는 정치적, 물리적 지배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의 지도 학문인 인류학이 탄생하였다.
 태생적으로 인류학적 제 학문과 사진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학문과 도구로서 기능했다. 인류학은 인종학과 사회적 다윈주의 등과 연계하면서 오리엔탈리즘을 창출하여 '식민지 개척은 미개인을 문명화시켜 주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려는 것'이라는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사진은 서구인들의 자기정체성 확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만들어낸 타자 개념인 동양에 대한 재현을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여기서 사진은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인류학에 과학적 지위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사진 자체가 인류학 나아가 근대 학문 전체의 원천, 근거, 결과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양자의 관계는 탄생의 근원을 같이하는 '제국주의의 쌍생아'라 할 수 있다. 인식론적 재현 또는 재현적 인식론으로 설명되는 서구 근대의 사유방식은 재현의 확실성에 근거해 진리를 규정짓는다. 근대 학문이 이전의 학문과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즉 근대 학문은 재현의 확실성을 위해 과학성과 실증성, 객관성 그리고 검증가능성 등을 자신의 덕목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러면 사진은 어떠한가. 재현의 투명론자들의 진단처럼, 사진은 무언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사실에 대한 틀림없는 재현이며, 존재 증명의 기능을 본성으로 하는 태생적 객관이라고 설명되었다. 즉 투명하고 객관적 실체로서 사진을 바라보았다. p.111-113

 

Posted by 아이스티

2010/08/20 01:14 2010/08/20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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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심재휘

후회는 한 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내가 건너온 시장의 저녁이나

편지들의 재가 뒹구는 여관의 뒷마당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해 있는 것들 중에 만질 수 있는 것은 불꽃밖에 없다

는 것을 안다 한 평생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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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9 23:24 2010/07/29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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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식사

 거룩한 식사 /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는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Posted by 아이스티

2010/07/11 00:36 2010/07/1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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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de Graaf『어플루엔자』 (2002)


 "방에 들어갔는데 무엇 하러 들어갔는지 잊어버린 것과 같은 상황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잊어버린 것이 문화 전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경제라는 것이 뭐 하려고 있는 것인가?"묻는 것을 잊고 있다. p.191

 이 책은 바로 그 경제, 그것도 방대한 소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미국식 자본주의-그것이 전지구적으로 보편화 되기 위해선 지구가 4개 더 필요한-에 대한 책이다
 '풍요의 시대, 소비중독 바이러스'로서의 어플루엔자, 즉 저자는 미국사회(이는 곧 미국식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한국을 포함한-서구사회에도 적용된다)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소비에 대한 열광을 하나의 '질병'으로 비유한다. 책에서는 이 질병의 증상과 폐해를 다루며, 이것의 역사와 원인, 그리고 다양한 치료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책의 서술방식은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과 다소 비슷하다. 어떤 하나의 이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접근방식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소비주의가 가족과 전통적, 종교적 가치들을 위협한다는 보수적인 입장에서부터, 시민이 '소비자'로 전환된 것에 대한 진단, 노동시간의 단축대신 더 많은 임금과 더 많은 소비라는 결과를 낳은 기술발전, 소비의 시장가격이 아닌 생태적 가격에 대한 고찰 등, 소비중독 바이러스에 대한 비판은 수많은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지난 60년대에서 시민에서 소비자로 돌연변이를 겪었습니다... 소비자가 되었을 때 곤란한 점은 소비자는 다른 소비자들에 대해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당위도 없다는 것입니다. 시민에게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시민은 동료 시민들에 대해, 도시의 환경과 역사의 보전에 관심을 기울일 의무가 있습니다."(116p)
 "...우리가 소비하는 거의 모든 것은 어디 다른 곳에서 온다. 문제는 그 '어디 다른 곳'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 (163p)
 "거의 하룻밤 사이에 좋은 생활good life이 상품 생활goods life이 되었다," (244p)

 
1부에서 이러한 다양한 고찰을 끝낸 이후, 2부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어떻게 어플루엔자가 광범위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조망하고, 3부에서는 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는 명백히 우리의 사회적 질병은 개인적 실천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지지한다"(364)는 언급에서 보이듯이, 이 대안 역시 소비중독에 걸린 개인을 치료하는 의학적 방법에만 그치지 않는다. 소비에 대한 자가진단이나, 미국에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소비중독 치료 코스들에 대한 소개는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는 노동시간의 단축, 단계적 은퇴제, 진정진보지수(GPI)와 같은 신선하고도 실제로 시도되고 있는 대안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재밌는 점은, 저자의 위트와 문학적인 비유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먼 미래의 문명들은 우리 시대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까? 그들은 종다양성이 재난에 가깝게 쇠퇴한 원인을 찾아낼까? 아니면, 과거의 멸종 원인을 탐구할 때 우리의 과학자들이 그러듯, 그저 어깨만(그때까지 어깨가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들썩하고 말까?.... 하지만 우리 문명의 체면을 위해, 그들이 더 싼 커피와 가솔린과 속옷에 대한 우리의 강박적 욕구가 그 원인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치욕스런 증거는 찾지 못하기를 바라고 기도하자." (168p)

 = = = = = = = = = = = = = = = = = = =
  서구에서 소비자본주의의 부흥기는, 소위 '복지국가의 황금기'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많은 생산과 많은 소비, 구매력을 담보해주는 수단으로서의 후한 복지급여, 케인즈주의적인 복지(국민)국가. (아직 끝나지 않은 소비자본주의와, 여명기에 접어든 과거의 관대한 복지국가의 부조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이 과거는 비용절감이라는 자본의 당면과제가 모든 국가들의 사명이 되어 버린 지금 상황에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당하다. 소비적 복지가(여기서 '소비적'이라는 말은 노동연계를 중심으로 하여 (자본의 이윤과)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입장에서 기존의 복지제도을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낙인찍는 맥락과는 다르다) 소비자본주의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소비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볼 때 과거의 '좋은 시절'로의 복귀가 '제 3의 길'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복지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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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8 02:33 2009/06/18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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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후불제 민주주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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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보적(이라고 스스로를 자처하는) 고등학생이 읽어야 했던 책들이 있었다. '톨레랑스'라는 화두를 던졌던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나 귀화 지식인 박노자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와 같은 책들.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도 그 중 하나였고, 당시 경제학과를 지망하고자 했던 나는 - 경제학과와 사회학과 중 경제학과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도 유시민이라는 선배의 존재였다. 사회학과엔 김민석이라는 pushing factor가 있었다-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표절의혹에 시달리기도 했지만"과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를 모조리 읽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고, 유시민이 주도해 창당했던 개혁국민정당에 덩달아 가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냈고, 대표적인 친노 인사중 한 명으로 거론되곤 했다. (이 정국에서 그는 노회찬의 표를 압도적으로 잠식하면서 서울시장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다) 나는 예전보다 조금(?) 왼쪽으로 이동한 대학생이 되었다.
 '과거의' 유시민이 썼던 책들의 불온함은 제도교육을 받는 고등학생이었던 '과거의 나' 금지된 것을 범하는 즐거움을 주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내용도 알차고 유익했다. 수 년이 지나 자칭 '정치적 유배'를 떠나있는 그의 글에선 이제 그러한 불온함을 찾아볼 수 없다. 혹은, 그정도의 불온함은 불온함으로 여기지도 않을 정도로 내가 먹물을 들이킨 것일지도 모른다. (4년제 대학생에게, '지식소매상'의 상품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수도 있다)하지만 책 후반부를 채우는 자신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자기변명과 반성을 오가는-에서 나이먹은 사람의 보수성의 향기가 풍겨진다.

 2.
 "나는 대한민국이 '아직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할부금을 다 치르지 않은 채 타고 다니는 승용차와 비슷하다.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를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다 치르지 않았다. 헌법 제1조는 '존재Sein'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당위Sollen'를 선언한 것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59p)

 책의 제목이자 전반부의 문제의식은 헌법과 자유, 민주주의를 관통한다. 아직 그 비용을 다 치루지 않았기에, 지도자의 선의에 의존하던 후불제 민주주의는 그것을 지킬 용의가 없는 지도자(MB!)가 들어서는 순간 붕괴의 위험을 맞는다.-마치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의 독일처럼-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근거로 저자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부정하기 힘든 '헌법'을 들고온다. 그리고 그 근거는 법치를 앵무새처럼 중얼거리고 있으나 이를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떼법근절과 기초질서확립(을 통한 국가경쟁력 향상)'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정권, 집권 1년만에 책에 쓰일수 있는 무수한 사례를 제공한 자들이 있기에 더욱 적절하다. 하지만 나에게 새로운 내용은 그다지 없었기에, 크게 재미는 없다.
 성격상 자유주의자에 가깝기에, '사회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저자의 반자유주의적 정권인 MB에 대한 비판과 헌법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대체로 동의할수밖에 없다. 하지만 '재산권'을 논하는 장에서 '사회적 자산에 대한 전면적인 집단의 소유는 반드시 전체주의로 귀결된다'는 논리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3. 오히려 재미있던것은 후반부인데, 자신의 정치경험(국회의원, 장권)을 중심으로 한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자신이 지지했던 노무현, 참여정부에 대한 변명, 반성, 자기비판 등등이 어우러져 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시절의 경험을 이야기 하는 대목은 마치 '리더쉽' 강연서를 보는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노 전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라는 의미에서 한부분을 인용해보자면,

 "...그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사회적, 정치적 계약의 산물로 보았기 때문에 국가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재신임, 사임, 임기 단축 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지율이 너무 낮은 대통령이 계속 재임하는 것이 나라와 국민에게 좋은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제한된 권력을 가진 민주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언론, 사법부, 헌법재판소, 선관위, 정당 등 다른 권력기관과 수평적인 다툼이나 권한쟁의를 벌이면서 서로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것이 대통령답지 않은 언행이라고 생각했다. 보수 언론과 싸우고 검사들과 논쟁하고 선관위나 헌재와 대립하고 여야 정당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통령이 된 것은 하늘이 내린 운명처럼 무거운 것인데 노무현 대통령은 그 소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209p


 4. 시절이 수상한 만큼 서울시장후보로 언급이 되고 있기 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보여지는 태도로 추측하건대, 쉽지 않을 것 같다. 수년간에 걸친 자신의 정치실험(개혁국민정당과 열린우리당, 참여정부)이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정치적 동지를 떠나보낸 상황에서 다시 그 길을 택할지... 흠

 덧. 여러 측면에서 이 책은  Naomi Wolf의 the End of America와 많이 닮았다. '자유민주주의'적 원칙에 대한 강조와, 출판 당시 집권하고 있던 보수적, 퇴행적 정권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저술되었을 법 하다는 점. 유시민이 들고나오는 '헌법애국주의'와 Naomi Wolf가 강조하는 '건국 선조들의 정신'는 크게 엇갈리지 않는다. 하지만 양자 모두,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들고 나옴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언급은 깊지 않다는 점도 흥미롭다.

Posted by 아이스티

2009/06/06 00:49 2009/06/06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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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독일시대 청소년들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는 책. 열명 남짓의 십대 청소년들이 등장하며,  연대기순으로 서술되는 십여년간의 독일 역사에 이들을 등장시킨다.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해 독일판 이승복이 된 헤르베르트 노르쿠스에서,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조직에 들어간 아이들, 학교와 대학에서 반나치활동(백장미단)을 벌이다 처형당한 이들, 유대인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청소년들의 생각과 삶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이들과 부모세대의 갈등이 흥미롭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과 패배의 경험을 통해 또다른 전쟁을 준비하는 히틀러와 나치당에 거부감을 가졌던 부모 세대와, 전쟁의 경험이 없이 히틀러의 빛나는 미래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던 자녀세대간의 갈등. 충성스럽지 않은 자신의 부모들을 당국에 고발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한다. 전쟁의 경험과 이로 인한 세대의 갈등은 한국현대사와도 크게 맞닿아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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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6 00:33 2009/05/26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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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고종석. (개마고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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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처음 발행되었는데, 대학 들어오기 전부터 여기저기서 제목을 많이 본 적이 있는 책이었다.  유시민인지 진중권인지 이야기한 사람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는 평가를 들은 것만 기억을 한다.
 하나의 책이라기는 뭣하고, 몇 가지 에세이를 모아 놓은 책인데 꽤나 재미있다. 당시 벌어졌다던 영어공용화 논쟁을 둘러싸고 발표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에세이가 가장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고, 그외 '섞임과 스밈' '감염된 언어, 감염된 문학'과 같은 에세이도 같이 실려있다.

 "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던,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해야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국어 순화'의 '순화'는 제5공화국 초기 삼청교육대의 저 악명 높은 '순화교육'의 '순화'다, 실상, 순결을 향한 집착, 즉 순화 충동은 흔히 죽임의 충동이다. 믿음의 순결성, 피의 순결성, 이념의 순결성에 대한 집착이 역사의 구비구비에 쌓아놓은 시체더미들을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국어 순화'의 충동에 내재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p.151

 언어를 '순화'하려는 욕망에서 순혈한 전체주의 -독일의 언어정화에서 북한의 '문화어'정책까지-를 읽어내는 그의 자세에서부터 정확히 서구적인 '자유주의'적 입장(특히나 국가주의, 민족주의와 구별되는)을 읽어낼 수 있다. 순수한 언어란 없으며 환상일 뿐이라는 그의 입장은 평소의 내 생각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논쟁이 되었다는 영어공용화와 관련된 그의 입장은 다소 순진해보여 동의라기 어렵지만. 한창 안티조선운동이 본격화 될 때의 글이라, '나는 양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오로지 욕하기 위해서만 '조선일보'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로 시작하는 각주를 낄낄대며 볼 수 있었다. 독일어를 배우고 있는 상황에서 17세기 독일어 순화운동에 관한 짧은 내용 역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Posted by 아이스티

2009/04/25 18:38 2009/04/2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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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2009년 2월 28일.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③ 자크 랑시에르

자크 랑시에르는 1940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루이 알튀세르 등과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읽기 세미나를 이끌었지만, 1968년 이후 알튀세르의 이론주의와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며 그와 결별했다. 1970년대 내내 19세기 노동자 운동 관련 문서고를 연구하면서 노동자 정체성에서 벗어나 ‘공통적인 것’에 참여하는 정치적 형상들과 집단적 주체화의 문제에 천착했다. 그 결과물이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들의 밤>이다. 그 뒤로도 지적 능력의 평등을 다룬 <무지한 스승>, 정치의 종언론에 맞서 정치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그동안의 성찰들을 개념화한 <불화>, 민주주의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성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등을 썼다.


 모든 정부·통치는 과두적이다. 통치란 항상 통치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란 통치자격이 없다고 간주된,‘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 ‘공통적인 것’에 참여할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행위다. 이런 민주주의적 투쟁이 없었다면 우리에겐 선거권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는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정부는 그 조항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삭제하지 않았던가. 민주주의가 헌법 조문으로 보장되는 하나의 ‘정체’였다면, 국민들이 거리에서 헌법 제1조를 외칠 필요도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주장을 참조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 산다’는 표현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과두적인 우파 국가에 살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헌법이나 여타의 제도로 보장되는 하나의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정부/통치는 언제나 과두적이다. 통치란 항상 부·출생·지식 면에서 통치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치의 관건은 각자 본성에 맞는 직무와 자리, 자신에 맞게 보고 행동하고 말하는 방식을 배분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기원을 따져볼 때 투표 또는 대의란 넓은 땅에 살고 있는 많은 인구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가 아니다. 대의란 공통 사무를 관장할 자격을 지닌 소수가 다수에게 동의를 요구하는 장치일 뿐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란 통치 자격이 없다고 간주된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공통의 일에 참여할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민주주의적 투쟁과 정치적 실천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선거권마저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랑시에르에 따르면 대의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모순된 두 단어의 결합이다.

 랑시에르가 <불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묘사하고 있는 과두정의 풍경을 더 따라가 보자. 우리는 너무도 낯익은 그 장면에 섬뜩함마저 느끼게 된다.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방송에 출현해 일방적 담화를 쏟아내며 국민의 동의를 구한다. 국민의 목소리는 각종 설문조사나 여론조사를 통해 재현된다. 여론조사에 나타난 ‘주민’의 의견이 곧 ‘인민’의 의견과 동일시되고, 그 밖의 다르거나 보충적인 말과 생각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생각할 가치도 없어진다. 정치의 종언(한국의 우파들은 87년 6월을 등에 업은 정치 편향적 정권의 종언과 그것을 동일시했다)을 선언한 과두정의 통치자들은 공적인 일은 경제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대중은 사적인 이익활동에 매달리면 된다고 주장한다. 정부 주장에 반대하며 거리에 나온 자들은 통치 전문가들의 ‘과학’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도래하지도 않은 사건에 벌벌 떠는 ‘무지한 자’로 간주된다. 정부는 자본의 무제한적 증식에 맞춰 화폐와 주민의 흐름을 관리하는 기구로 전락했으며, 이 정부가 내세우는 진보적이고 현실적인 비전에 반대하는 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자’ 또는 퇴행적 이기주의자로 치부된다.

 더구나 정부의 통치를 반박하는 의견은 혹세무민하는 ‘포퓰리즘’으로 낙인찍히고 처벌받는다. 거리에서 표출되는 목소리와 함성은 통치자의 귀에 ‘들리지 않으며’, 도로를 점거한 시민들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뿐이다. 거리를 물대포로 청소하고 컨테이너로 만든 숭고한 작품을 전시한 우리 정부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듯이, 과두정이 추구하는 최고 목표는 ‘인민 없는 통치, 정치 없는 통치’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또 하나의 풍경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국민의 목소리를 하나의 말로 간주하지 않던 정부는 거리에 나온 모든 국민을 주권자로 보기는커녕, 사회의 부분으로 셈하지도 않으려 했다. 이에 맞서 도로를 점거하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쳤던 익명의 사람들, 즉 ‘아무나’가 있다.

 그들은 헌법 제1조를 외치면서 헌법이란 반복적으로 ‘검증’되는 순간에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헌법은 투쟁 속에서 매번 다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시위대는 ‘인민 없는 경영’의 정치를 주장하는 하나의 세계와 ‘인민 권력’의 또 하나의 세계를 함께 놓음으로써 서로 불일치하는 공통의 무대를 세웠다. 이처럼 정치는 사회적·이데올로기적 갈등을 해소하거나, 각 개인 또는 집단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중재하고 경영하는 ‘합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분할’과 ‘불화’에 있다.

 정부는 쇠고기 수입 문제를 ‘사적인’ 소비의 문제로 환원했으며, 이 과두정을 함께 경영하는 전문가들은 IT산업과 자동차를 위해 축산업을 희생해야 한다는 ‘공공선’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나눔에 반대함으로써 인민은 더는 소비자 대중으로 머물지 않고 정치적 주체가 되었다. 이 정치적 주체화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아는 자와 무지한 자를 나누는 정부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에서 이탈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시위대가 말하는 인민권력은 비단 하층민이나 노동자 계급의 권력을 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통치 받을 자격 외에는 다른 자격을 갖지 않은 모든 자들의 권력으로 확장되어야할 것이었다. 통치가 아니라 정치를 했던 그 ‘아무나’들이 가진 것은 부, 출생, 지식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뿐이었다.

 이것이 랑시에르의 사유를 ‘지금 여기에’ 중첩시켰을 때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이다. 독자들이 랑시에르에게 기대했던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런 얘기들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랑시에르는 “지식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지적 능력의 평등에서 출발하지 않고 지식인과 대중을 나누는 것은 이미 통치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유의 의의는 오히려 우리가 잠시 겪었던 사건들을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사건을 반복하도록 촉발하는 데 있다. 그가 지식인이 아니라 한 명의 ‘무지한 스승’으로서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아닐까. “네가 하는 것을 계속하라” 네가 가진 힘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 우연적 사건을 되풀이하라, 네가 배운 것을 다른 모든 것과 연결하라.

양창렬/파리1대학 박사과정

 = = = = = = =

 자크 랑시에르도 한번 읽어볼까. 지그문트 바우먼도 읽고싶은데.. 흠.

Posted by 아이스티

2009/03/01 01:47 2009/03/01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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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제목을 보고 이게 웬 반미서적인가 하겠지만, 아쉽게도 저자인 Naomi Wolf는 모범적인 미국 시민으로서 반미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미국에서 그녀의 책은 'Letter of Warning to a Young Patriot'라는 제목을 달고 나와있을 정도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의 제목은 '우리(미국인들)가 알고 있던, 혹은 건국 선조들의 자유에 대한 정신이 살아있는' 미국의 종말일 것이다.
  저자는 미국 건국 선조들의 고뇌와 그 결과물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영국 등 유럽에서 종교와 국가의 탄압을 받아왔고, 미국에서도 영국의 식민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그 어느것보다도 국가에 대한 시민의 자유를 지키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아왔다. 연방제, 시민들의 자유와 사생활에 대한 보호, 인신구속을 위한 엄격한 절차 등은 이의 산물이었고, 이를 토대로 미국은 소련이나 나치 독일과 달리 '열린 사회'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하지만 이런 성과들이 부시 집권, 정확히 말하면 9.11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파괴되어 왔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그녀는 이것이 과거 나치 독일과 구소련 등 '전체주의 국가'들이 걸어왔던 경로와 흡사함을 지적하고, 그것을 열 단계로 분석하여 미국의 현 상황과 대조한다.  이 열단계는 그녀가 2007년 4월에 기고했던 영국 Guardian지의 "Facist America, in 10 easy steps"라는 기고문에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 상당히 '미국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우선, '우리의 아름다운 미국'이라는 의식이 깊게 녹아있다. 지금(저술 당시)은 부시정부의 일탈로 인해서 파시스트 국가로 가는 걸음을 가고 있지만, 건국 당시의 정신을 복원시킬수 있다면 진정 앞선 국가공동체로 갈 수 있다는 믿음. 한국의 좌파세력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에 대해서 이러한 헌신을 보이는 것은 발견하기 어렵다. 아마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인디언을 몰살시킨 후) 자유로운 연방 공화국을 건설했다는 미국의 역사적 자부심과, 외세에 의한 분단과 다분히 외세의존적인 건국과정을 거쳐야 했던 한국의 역사적 굴곡이 주는 차이점이지 않나 싶다.
 또한 한국판의 부제는 '혼돈의 시대, 민주주의의 복원은 가능한가'인데 이 책에서 민주주의는 시민의 자유와 동일한 의미로 해석되는 듯 하다. 사회경제적인 관점에서의 민주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 등에 대해서는 거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 또한, 복원되어야 할 미국의 대칭에는 '전체주의 국가'가 자리잡고 있는데, 따라서 레닌과 스탈린, 히틀러와 피노체트가 가볍게 '독재자'라는 범주로 묶이게 된다.

 - 부시 정부와 과거 파시스트 정부들에 대한 '묘사'로만 가득찬 이 책은 그닥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순 없으나, 시기를 잘 만났다고 할 수 있다. 부시정부 하에서 쓰여졌으며, 저자가 바랬음직한 오바마가 차기 대통령의 자리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2008년 12월 '이명박 시대'에 번역 출판되었으며, 오바마 당선 이후 이 책의 광고는 부제를 약간 수정하여 '새로운 오바마 시대, 민주주의의 복원은 가능한가'로 바뀌었다. 번역은 성공회대의 김민웅 교수.

 - 저자 Naomi Wolf가 미국에서도 꽤나 유명한지, 동일한 제목으로 2009년에 다큐도 만들어 지고 인터뷰 영상도 찾을 수 있었다. Youtube에 올라와 있는 인터뷰Amazon에 올라와 있는 다큐.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판 표지와, 미국에서 만들어진 다큐 포스터. 한국판 표지보다는 다큐 포스터가 좀 더 인상적이다. 칼을 든 자유의 여신상은 미제국주의의 상징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저자는 제국주의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이니...
 

Posted by 아이스티

2009/02/27 01:25 2009/02/27 01:25

미래학자 짐 데이터의 현실 진단. 2008.08.01


 ...믿을 만한 통계에 따르면 쿠바는 지구상에서 가장 건강한 국민들이 사는 나라다.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의 대(對)쿠바 경제봉쇄 정책 때문이다. 쿠바로 들어가는 석유량을 미국이 통제하자 쿠바 국민은 이를 견디기 위해 걷거나 자전거를 탔고, 기계를 사용하기보다 수작업으로 일을 했다. 석유 에너지를 마구 사용한 하와이 주민들이 비만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반면 쿠바 주민들은 석유 없이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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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이스티

2009/02/25 02:32 2009/02/25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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