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5분간에 생각할 수 있는 죽음의 흔적들은, 이리도 많다. 어쩌면 살아있다는것이 묘한 기적(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래서 삶에 감사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찬양은 그닥 내키지 않는다)일 정도로 죽음의 화살들이 내 귓가를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여인의 인생의 3단계와 죽음> 한스 발둥, 1510년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반대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영원성, 사후세계와같은 것들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지금 우리가 내릴수 있는 가식적인 모범답안에 불과한 것일런지도. 근대를 열었고 꽃피웠던 모든 진보적이고, 계몽적이고 합리적인 학문과 이론, 인식들이 가져다준 수많은 이로움들은 나열하는것이 무의미할만큼 명백하고 다양하지만, 동시에 그 찬란함을 이승의 범위에만 묶어준것이 아닐까 한다. 아마도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해주었을, 그래서 좀더 평안함을 느끼게 해주었을 종교를, 비합리적 유산이나 인민의 아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해석해 버리는 그 이론들이 가끔 몸사래칠정도로 미워지기도 한다.
합리적인 인식, 그 표층에서 죽음은 삭제되었지만 - 그것이 결코 삭제될 수 없는 것은 명백하고, 또한 모두가 알고있기에, 이제 사람들이 원하는것은 120살을 웃도는 '장수'일 뿐. 영생이나 불로장생을 이야기 하는것은 저 멀리 진시황의 탐욕이거나, 사이비종교의 개소리가 되어 버렸다. 그저 할 수 있는것은 죽음의 계보학을 열람해보거나, 미술에서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도상학을 탐구해보는 일일지도. 서점에 들러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이란 책을 샀는데, 중세 초반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미술에 투영되었는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하지만 어쩌라고, 여전히 (적어도) 나에겐 죽음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 공포라고 하기도 뭣한 저 심연에 알 수 없는 검은색의 어떤 것인데, 중세 초반에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이런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것은 어찌해야 할까. 결국, 천수를 다하고 죽을것을 바래야 하는것인지, 하지만 오래 살기 위해 아무리 내 삶은 주조한다 해도, 밤중에 열려진 맨홀뚜껑이나 미끄러운 욕실 바닥은 얼마던지 날 비웃어줄 준비를 하고 있지 않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이 언제 어디가 될 것인지를 알수 있으려면 좋으련만, 그것도 할 수 없는 세상에선 그저 넊놓고 있을 수밖에.
Posted by 아이스티

